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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아 Aug 13. 2024

DON'T TOUCH. 만지지 마세요!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중 하나라고 확신한다. 가족 간의 불화로 보호센터에서 지내다 집으로 돌아오던 순간, 일기를 쓰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며칠만 지나도 금세 그 사이의 일을 잊어버리곤 한다. 집 현관문을 열고 발을 들이는데, 이대로 내 인생을 흘려보내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내 인생을 남기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내 삶의 자취를 기억해주지 않을 텐데. 그래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2015년부터 기록하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10년 차다.


기록의 질과 양은 점차 농도가 짙어졌다. 단순히 하루의 일과를 나열하던 것에서 벗어나, 그 순간 나와 상대방의 감정, 그 공간의 향기, 분위기 등 놓치기 싫은 것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했다. 내 일기장 안에서 나는 생물로 살아 숨 쉬었다. 껍데기만 남은 인간이 아닌 진짜 생명의 숨결을 품고 생동감 넘치게 날뛰는 사람으로 존재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록한다. 나를 놓아버리지 않기 위해서. 






2018.12.05(수)


벌써 연말이다. 어느덧 1년 차 신입사원 생활도 끝나간다. 추운 날씨와 상반되게 연말 분위기에 사람들의 기분은 들뜨고 그에 맞추어 거리에서 캐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업체와의 송년회 회식도 잦아졌다. 오늘도 다름없이 그런 날이었다. 업무를 마치고 사수차를 타고 회식장소로 이동했다. 오늘 메뉴는 내가 좋아하는 거다. 아구수육이라고 들어봤는가? 처음 취직하고 회식으로 먹어본 뒤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아귀찜만 먹어봤지 아구수육은 처음 먹어 보는 거였는데, 그 쫄깃함이 차원이 달랐다. 또 내장은 어찌나 고소하고 감칠맛이 돌던지. 글을 쓰는 지금도 생각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간다.


회식이 많은 부서이다 보니 업무의 연장선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게 맛있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이 날 조금은 설렜다. 하지만 역시 인생사 새옹지마,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상대 업체는 규모가 곳이었는데 거기서도 이사님과 부장님이 참석했다. 한 낱 신입사원이 큰 기업의 이사님을 마주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임원이 동행하는 회식에 참석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올 한 해 서로의 협력에 감사하며 내년에도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기를 바라며 덕담을 나누는 자리였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 자칫 실수를 해 비즈니스 관계에 먹물을 끼얹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평소보다 반듯하고 예의 있게 행동했다. (물론, 열심히 아구수육은 집어 먹었다.) 


인상이 꽤 강단 있어 보이는 이사님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신입사원이냐고 물었다. 올해 입사한 신입사원이라고 인사했다. 


"어쩐지. 그러니까 술자리 예절을 잘 모르지. 내가 하나 가르쳐 줄게요."


이사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건배를 할 때는 상대가 나보다 연배나 직급이 높으면 그 사람보다 술잔을 높이 들어선 안돼. 항상 더 낮게 들어야지."


그러면서 그는 내 잔에 자신의 잔을 더 낮게 부딪히는 시늉을 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술자리 예절에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곧잘 적응했다. 그날은 하루종일 서로가 바닥을 깔려고 기를 쓰며 '누가 누가 가장 잔을 낮게 드나' 대회를 하는 것 같았다. 이사님만이 예외였다. 점잖은 표정으로 자신의 잔은 항상 높게 유지했다.


술잔이 한 잔 두 잔 오가고 양측 모두 술기운이 조금씩 올랐다. 술이 쌔보이는 이사님은 얼굴빛에 큰 변화는 없었으나 제스처와 목소리가 커지는 걸 보니 취한 건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불안감이 업습했다. 은근슬쩍 그는 내게 스킨십을 시도했다. 엄밀히 말하면 내게만 시도한 것은 아니고 우리 부서 사수 둘에게도 그랬다. 러브샷을 제안했고 은근슬쩍 손을 잡았다. 가벼운 포옹도 했는데 나는 그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수 둘도 그저 웃고 떠드는데 내가 인상을 쓸 수는 없어 애써 미소를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점점 더 그 자리가 불편해졌다. 긴장을 바짝한 탓에 나만 술이 덜 취한 건지 아니면 내가 아직 신입이라 이런 회식 분위기에 적응을 못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이 사람들의 행동이 이상한 건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회식자리가 파하며 이사님은 내게 말했다.


"신입사원이면 신입답게 좀 유들하고 그래야지 너무 뻣뻣하면 안 돼."


이 말에 뇌의 신경 한 부분이 툭 하고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모두들 자리를 떠나고 혼자 집으로 가는 동안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이사가 말하는 '뻣뻣함'이란 '스킨십을 유연하게 받아주지 않은 것'을 뜻했다. 신입이라서 불편한 스킨십도 웃어넘겨야 하고 신입이라서 옳지 못한 꾸지람도 들어야 하는구나.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시야에 가로수와 가로등이 뒤섞여 울렁였다. 속이 매스꺼운 것도 같았다. 


전화를 들었다. 남자친구를 부르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한참 눈물을 쏟았다. 나는 이런 취급을 받으려고 회사에 들어온 게 아닌데 서러움이 몰려왔다. 한참을 울다 보니 남자친구가 기숙사 앞으로 왔다. 그는 함께 울분을 터뜨려주고 욕을 해주고 화를 내줬다. (힘들었던 신입사원 시절을 버티게 해 줬던 그에게는 지금도 참 감사하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퉁퉁 부은 눈을 가리며 기숙사로 들어갔다.


대리가 된 지금이라면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선이 넘는 행동은 제지하고 서로가 기분 상하지 않는 선에서 술자리를 풀어갈 수 있었을 텐데. 신입사원 당시의 나는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매우 당황했을 거고 아무리 표정을 숨기려 했어도 그게 드러났을 거라 생각한다. 그 당시 중재를 해주지 않는 사수 둘에게도 참 미운마음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들에게도 고충이 많았겠구나 싶다. 물론 그 당시 내 마음에 대해서 얘기하진 못했다.(그때의 나는 아직 그런 용기가 없었다.) 그냥 그게 일상적인 거냐고 물었다.


"거기는 양반이야. 다른 회사 부장은 노래방에서 허리 감싸서 너무 당황했다니까."


그들도 그 행동이 좋아서 웃으며 받아준 게 아니라 분위기상 그저 맞춰줬을 뿐 인걸 알게 됐다. 이게 사회생활이라는 게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조금 더 성장한 나는 앞으로 더 어려운 일도 유연하게 잘 이겨내 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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