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겁고 지난한 12월을 지나 1년 차 신입사원 생활의 막을 내렸다. 대인관계에서 비롯된 커져가는 회사스트레스와 더불어 내 안의 우울과 불안은 점점 더 깊게 뿌리를 내렸다.
우리 회사의 전통 중 하나인 저 연차 회식 1,2,3년 차 회식이 있는 날이다(<공황장애 환자의 신입사원 생존기 08화> 참조). 어느덧 일 년이 흘러 2년 차로서 회식에 참석한다. 막내 생활을 벗어던지고 후배들을 직접 대면하는 자리다. 설레고 기뻐야 마땅한데, 나는 불편하고 갑갑했다. 이즈음 심해진 내 우울증세는 부정적인 기운을 나에게 자꾸 불어넣었다.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던 타인의 행동과 말도 아니꼽게 뇌리에 박혀 몇 날 며칠을 곱씹다 마음 깊숙이 상처로 박아 넣었다.
그래서일까. 동기들이 불편해진지도 꽤 오래되었다. 대다수가 타지에서 와 기숙사 생활을 같이 하다 보니 퇴근 후에도 싫어도 좋아도 마주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숨 막힌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단 한 명. 회사 동기로 입사하며 재회하게 된 같은 과 언니(<공황장애 환자의 신입사원 생존기 05화> 참조). 그 언니만이 유일하게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를 안정적이게 유지 중이던 내게 낯선 사람이 섞인, 거기다 다수의 모임은 쥐약 그 자체였다. 그렇다고 회식을 거절할 용기도 내게 없었다.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그랬던 걸 보면 타고난 성향인 듯한데, 나는 매우 내성적이고 남눈치를 많이 봤다. 타인의 입꼬리 하나, 눈 깜빡임 하나, 손짓 하나, 말투 하나까지 신경을 곤두세워 눈치를 살폈고, 그가 나에게 호의적인지, 실망했는지, 기분이 나쁜지, 그래서 적대적으로 돌아섰는지 끊임없이 재단했다. 그리고 그에게 나의 행동을 맞췄다. 그래야만 배척당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미움받을 용기 따위는 내 몸 구석에 0.1%라도 자리 잡고 있지 못했다.
극단적 *INFJ(I(내향적이고), N(눈치를 많이 보고), F(피곤하게 잡생각을 많이 하고), J(잘못한 게 있을까 끊임없이 살피는))였던 나는 당연히 무리에서 소외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회식에 참석했다.
* 실제 MBTI가 INFJ이긴 하나, INFJ의 실제 성향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재미를 위해 I, N, F, J에 그 당시 제 마음 상태를 붙여보았습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룸메를 비롯해 다른 동기들 모두 얼굴에 웃음이 만연했다. 일 년 동안 지내며 어느덧 친해진 일 년 위 선배들, 그리고 처음 맞이하는 후배들, 이 얼마나 행복한 화합의 장이란 말인가. 화기애애하게 오가는 인사와 농담 속에서 나는 홀로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목이 말라서가 아니라, 어색해서, 너무 불편해서 자꾸만 컵으로 손이 갔다. 힘을 짜내서 미소를 보냈으나 자꾸만 나는 무리에서 겉돌았다. 테이블에 모여 앉은 그들의 시선과 말은 한 곳을 향했다, 주기적으로 그다음곳으로 옮겨갔는데, 거기에 나는 제외되었다. 나는 그들 속에 껴서 같이 말을 나누지도, 웃지도 못했다. 군중 속의 외로움을 많이 느껴봤는데,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꺄르르륵. 다음에 우리 집에 놀러 와요. 같이 밥 먹자."
여자동기들과 여자 후배들이 어느덧 친해진 듯했다. 한 여자후배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킨 것도 같았다. 휙. 시선이 돌아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여자후배는 고개를 돌려 다른 여자 동기들과 신나게 대화를 나누었다.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또한 자주 느꼈던 감정이기는 하지만 당할 때마다 기분이 좋지는 않다.
약육강식의 세게. 무시무시한 맹수들이 날뛰는 세렝게티 같은 거대 초원에서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니다. 21세기. 인간사회에서 가장 강하게, 그리고 잔인하게 적용되는 게 약육강식이다. 악다구니를 쓰며 말다툼을 해보지 않아도, 주먹을 들어 올려 펀치를 날리지 않아도, 눈빛, 말투, 자세, 그 사람 자체가 풍기는 분위기와 주변의 호의적인 태도, 그 사람을 대하는 방식 만으로도 누가 강자인지 약자인지를 우리는 바로 파악할 수 있다. 나는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약자로 보내왔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약하다. = 친한 사람이 별로 없고, 목소리가 크지도 재미있지도 않으며, 그래서 분위기를 주도할 능력이 없다. = 즉, 나와 친해져 봤자 이득인 게 아무것도 없다. = 최약체이며 무시해도 되는 존재다.'라는 이론이 성립된다.
내게서 등을 돌린 채 동그랗게 원을 만들고 하하 호호 크게 웃는 그들이 나는 원망스럽고, 서운했으며, 짜증도 났지만, 결국에는 그래,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납득했다. 학창 시절엔 그 무리에 끼고자 부단히 노력을 한 적도 있다. 모두 내게 등을 돌리고 섰지만, 나는 그 등 뒤에 바짝 붙어 어떤 말이라도 한마디 껴보려고, 어떻게라도 친구들에게 웃음을 주려고, 그러면 나도 껴주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지금은 그런 에너지 마저 남아있지 않는 것 같다. 한 발짝 뒤에 서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게는 당도하지 않는 시선과 음성을 서글프게 인식하며.
지금의 나는 저때의 나와는 많이 다르다. 물론 사람 성격 안 바뀐다고 내향성을 많이 지니고는 있지만, 저 당시의 나는 마음이 많이 아팠기에 비뚤어진 생각으로 상황들을 받아들였다. 그게 또 내 정신을 더 헤집어 놓고, 그러면 또 나는 더 예민해지고. 악순환이었다. 동기들도, 후배들도, 선배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는데(나와 맞고, 맞지 않음이 있을 뿐. 모두 좋은 사람들이긴 하다.) 내가 그 무리에 끼지 못했기에 나는 그들을 많이 버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금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많이 맑아졌기에 훨씬 가볍고 진실된 마음으로 그들을 대할 수 있고, 그래서 고맙고 좋은 존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