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그 엄마한테 연락해 봐라 빨리. 연락 안 되나?"
아빠의 성화가 빗발쳤다. 지난주 사건이 일어난 이후 엄마는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 이제 익숙할 법도 하지만 20대 후반의 직장인에게도 여전히 두렵고 막막한 일이었다. 대학생만 되면, 내 손으로 돈만 벌면, 가족의 문제로부터 분리가 가능해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부한 말인 혈연에 묶여 나는 여전히 부모의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상처받고 있었다.
미취학 아동일 당시에 계곡으로 고모, 고모부와 함께 가족 나들이를 간 적이 있다. 어렴풋한 기억 속 아빠의 욕설 섞인 고성과 말리는 고모의 목소리, 엄마의 울음이 섞이어 떠오른다. 아빠가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이 상황을 끝내 주길 믿음을 걸어볼 사람은 그 자리에 있는 어른인 고모, 고모부 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내 기대치만큼 상황을 풀어가주지 못했다. 나는 너무나 어리고 약했고, 울면 일이 커질까 봐 눈물을 삼키며 아빠를 힘없는 소리로 말렸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한바탕 아빠의 소란으로 인해 엄마가 집을 나갔다. 하교 후에는 거실에 붙들려 앉아 새벽까지 아빠의 욕설과 푸념을 들어야 했다. 온 집 가득 아빠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비염에 천식이 있었던 나는 그 담배냄새가 너무나 숨 막히도록 견디기 힘들었지만 아빠의 말에 토를 달아서는 안 됐다. 그랬다간 일이 더 커질 것이 자명했다. 너희를 버리고 나간 엄마 편을 드냐며 불같이 더 화를 낼 것이었고 그러면 이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날 시간만 더 길어질게 뻔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채로 학교를 갔다. 수업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즈음이었다. 갑상선 항진증을 앓게 된 게.
눈은 두꺼비마냥 튀어나왔고 몸은 축축 쳐졌으며 우울증상이 함께 찾아왔다. 친구들의 대화주제가 모의고사, 성적, 목표대학으로 맞춰지던 시기였다. 나에게는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돌파구가 필요했다. 물론 핑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공부로부터 도망쳤다. 아이돌과 게임에 빠져들었다. 수학여행 짐을 쌀 때, 엄마가 집에 없었다. 친구들은 엄마와 수학여행 옷을 쇼핑했다고 자랑했다. 나는 수학여행이 가기 싫었다. 가서 억지로 행복한 척 웃는 게 나한텐 큰 고통일 거다. 그렇다고 집에 남아서 아빠의 욕받이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담배연기와 냄새를 떠올리면 구역질이 났다.
눈은 점점 더 튀어나왔고 아직 이게 갑상선 증상이라는 걸 몰랐던 내게 우리 반 일등이던 반장이 "너 갑상선 같으니 병원을 가봐라."는 말에 처음 병원을 찾았다. T3 수치가 정상인의 400배로 나왔다. 심각한 항진증이었다. 아침, 점심, 저녁 약을 왕창 받아왔다. 그 이후로 15년간 나는 아직도 약을 복용 중이다.
지금 떠올려보면 미취학 아동,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내내 나는 우울하고 불안했다. 다만 그게 우울증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고 안 그래도 위태로운 가정환경에 나의 불안까지 더할 순 없었다. 무서웠다. 그게 더 큰 문제를 만들까 봐. 대학생 4학년이 되어서야 판정받은 우울증과 공황장애라는 병명은 내가 나를 돌보지 못하고 방치한 만큼 깊은 뿌리를 내렸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을 읽었다. 제목이 강하게 끌렸다. 매력적인 제목만큼 내용은 그리 흥미롭지 못했지만 내 상황에서는 읽어 보지 않을 수 없는 책이었다. 지난주 업체 미팅에서 칭찬을 들었다.
"코코아 사원님, 참 살림을 잘할 것 같아요."
무슨 상황에서 저 말을 들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나는 빨리 결혼을 하고 싶었고, 단연 그 목적은 원가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도피가 가장 컸다. 지금에서야 내가 온전히 정신적,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인간으로 서지 못하면 결혼을 도피처로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나사가 빠진 탑처럼 무너지게 될 걸 안다. 하지만 저 당시의 나는 정신적으로 많이 흔들렸기에 결혼만이 유일한 답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저 말이 너무나 큰 칭찬으로 와닿았다. 엄청나게 기뻤다. 멘탈이 약했던 만큼 사소한 호의에 쉽게 감동받고 작은 실수나 지적에 크게 상처받았다. 위태로운 가정과 회사생활이 지속됐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 항상 밝은 극 E 성향의 룸메가 있는 기숙사도, 엄마는 없고 독을 가득 품고 있는 아빠만 있는 본가도 그 어디에도 나의 휴식처는 없었다. 그렇게 신입사원인 내 앞날에 먹구름이 점점 짙게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