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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나르미 Dec 28. 2017

갑작스럽게 맞이한 외할머니와의 긴 이별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나고 출근했던 화요일, 집에서 나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어머니였다. 전화 속 어머니는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영규야,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어. 빨리 집으로 오렴." 

  사실 외할머니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올해 8월, 외할머니는 자궁경부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다. 암이 이미 머리로 전이돼서 뇌에만 종양이 13개가 생긴 상황이었다. 병원에서는 6개월 정도밖에 살 수 없다고 말했고 그때부터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외할머니와의 이별을 조금씩 준비했다.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이후 외할머니는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홀로 가족들을 돌봐오셨다. 우리 어머니를 포함해서 자녀가 5남매였으니 신경 써야 할 가족은 많았지만 워낙 정이 많으신 외할머니는 그 누구도 잊지 않고 꼼꼼히 챙겨주셨다. 심지어 병실에 입원했을 때는 간호사를 보고 돌아가시기 전에 나를 장가보내고 싶으셨는지 '저 참한 아가씨, 우리 영규 색시 삼았으면 좋겠다'라는 말까지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외할머니가 우리를 필요로 했을 때 우리는 그 누구도 챙겨드리지 못했다. 친척분들 말로는 예전부터 외할머니가 아프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워낙 혼자서 농사일을 많이 하니까 대부분 사람들이 무리해서 아프신 줄 알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최근에 받았던 건강검진에서 '이상 없음'이라는 결과가 나오자 우리는 외할머니가 건강하다고 믿은 것이다. 외할머니가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발인은 세종시 은하수공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됐다.

  나는 아직까지 누군가를 떠내보낸 일이 없기에 이런 외할머니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최근에는 뇌종양을 대부분 제거하고 의욕적으로 항암치료도 받았던 외할머니였는데.... 너무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푼 외할머니의 사랑 때문이었을까? 외할머니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사람들 눈에는 모두 눈물로 가득했다. 특히 외삼촌과 이모, 어머니가 '우리 엄마 불쌍해', '엄마 미안해', '어머니 아프지 말고 편안하게 가세요'라고 말씀하시며 오열할 때는 나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한 줌의 재로 사라진 화장터

 외할머니의 시신은 40여 분에 걸쳐 화장됐다. 유골은 곱게 빻아 한 줌의 재가 됐고 작은 유골함에 담겼다. 그 유골함을 모시고 우리가 향한 곳은 외할아버지 산소였다. 외할아버지 산소 옆에 외할머니 산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외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던 외할머니는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외할아버지 곁에 누우실 수 있었다. 묘소 봉분을 만들고 제사를 올린 이후,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헤어졌다.  

  불과 며칠 전, 크리스마스이브날에도 병원에서 외할머니를 뵌 나로서는 아직도 외할머니가 곁에 없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지금도 당장 외할머니 댁에 가면 외할머니가 웃으시며 '우리 영규 왔니? 식혜라도 한 그릇 먹을래?'라고 나오실 것만 같다. 하지만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외할머니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드리려 한다. 


외할머니, 마지막 여행길 편안히 가시고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외할아버지와 행복하게 사세요. 그동안 너무 감사했어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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