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보낸 사춘기의 시간을 글로 남깁니다.
둘째가 이번 주에 첫 수행평가를 본다. 영어 말하기인데 나에게 들어보라며 내 앞에서 외운 문장들을 말해줬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갑자기 그 문장이 왜 나와?"
"조건에 이 표현을 꼭 써야 돼요."
"그래도 문맥에 맞게 써야지 너무 뜬금없는 문장을 쓰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이렇게 해도 돼요. 조건에 있다니까요?"
"그 조건이 뭐야?"
아이는 수행평가 문제지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내 말이 맞다니까요?"
"봐봐, 여기 글의 맥락이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되어 있잖아, 이렇게 쓰면 안 된다니까. 이상하잖아. 이게 뭐야."
나도 말하며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음을 직감했다. 아이는 이미 기분이 상했다. 식탁에 놓인 숙제와 필통을 집어 들고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그 뒷모습이 이글이글했다.
"미안해, 네가 알아서 했을 텐데 엄마가 너무..."
"괜찮아요."
우리 사이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사춘기 자녀를 대할 때는 옆집 아이한테 하듯 잔소리를 최소화하고 주로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거리를 유지하라던 전문가의 충고를 잠시 잊었다. 뇌와 입은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이면서 왜 이렇게 손발이 안 맞는 건지. 먼저 충분히 들어보고 얘기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잘못을 지적하지 말고 좀 더 유하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후회했다.
그날 밤, 아이는 국어 시간에 시 쓰기를 해야 하는데 '별'을 주제로 쓸 거라며 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특성이 뭐냐고 했다.
('화해의 기회다. 대답 잘해라, 제발.' : 뇌가 입에게) "별?, 음... 일단 별은 반짝이니까 밝은 빛, 그리고 멀리 있으니까 거리감이 느껴지고... 그리고 또... 아, 주위가 어두워야 볼 수 있고, 밝은 낮에는 존재해도 보이지 않는... 뭐 이 정도."
"제 생각도 비슷해요. 별의 특성으로 비유도 하고 상징도 들어가게 시를 써야 해요."
"응 그래, 나중에 다 쓰면 꼭 들려줘." ('오케이, 여기까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 뇌가 입에게)
다음날 오후, 하교한 아이가 간식을 먹으며 자기가 쓴 시에 대해 들려줬다. 사실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잘 썼다는 칭찬만 해줬다. 잠시 후, 아이는 영어 말하기 대본을 수정했는데 들어 보고 이상하면 말해달라고 했다. 아이는 결국 내가 이상하다고 했던 부분을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게 수정했다.
"와, 어제보다 괜찮은 거 같은데?" (컷! : 뇌와 입이 동시에)
"그래요? 그럼 이걸로 말하기 수행 외워서 준비해야겠네요."
누구나 자기의 부족함을 지적하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아이라고, 내 자식이라고 다를 리 없다. 때로는 아이를 불편한 사람처럼 대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특히나 틀린 걸 지적하고 싶고 가르치고 싶을 때는 더더욱. 걸음마를 배우고 숟가락, 젓가락질을 배울 때도 칭찬만 해주며 기다리지 않았던가. 스스로 익숙해지고 능숙해지기를 기다리자. 나의 조급함과 간섭은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나를 위해서였다.
아이는 수행(遂行)을 준비했고 나는 그 아이를 보며 수행(修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