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가 써 내려간 왜곡된 역사
무심코 지나친 소중한 것들을 오늘은 알고 싶습니다.
겨울 방학에 저는 가족들과 부여로 여행을 갔습니다.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고 물놀이 시설이 있는 숙소, 근처에 가볼 만한 박물관과 문화단지등 볼거리도 많을 거라는 기대였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이곳을 통해 백제 역사 공부를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은 숨은 속내도 있었습니다.
부여는 지나는 곳곳이 발굴 현장이었고 박물관과 백제문화단지, 부여왕릉원을 둘러보며 백제의 화려한 예술과 기술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 만들었다는게 믿기지 않을 섬세한 토기들과 장신구들, 다양한 무기들과 깎아 만든 바둑알과 바둑판, 그 당시 나무판에 써 내려간 구구단과 보고도 믿기 힘들었던 금동대향로는 백제의 역사와 문화의 모든 것이 투영된 듯 보였습니다. 특히 백마강에서 배를 띄워 중국까지 갔다는 기록을 보고 조선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여행을 떠나기 전 도서관에서 백제에 관한 책들을 몇 권 빌려 읽어봤습니다. 그 책들은 저의 무지한 역사 지식에 많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중 가장 저를 당혹게 한 것은 백제의 마지막왕 '의자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역사선생님은 의자왕이 백제를 끝내 지키지 못한 무능한 왕으로, 삼천궁녀를 거느린 향락과 여색에 빠진 왕으로 묘사했었습니다. 절벽에서 삼천궁녀가 무서움에 떨며 치마를 뒤집어쓰고 떨어지던 모습이 연꽃 같다고 그 절벽이 '낙화암'이라 불린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죠.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근거 없는 이야기였다는 것을 저는 오늘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삼천궁녀'의 표현이 등장한 것은 조선초 문인들의 작품인데 (신라출신 고려 문인이 관련된 글을 썼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기록이 없음.) 그 이전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 어떤 역사서에서도 삼천궁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조선초 작품들의 영향으로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까지 의자왕과 삼천궁녀에 대한 이야기들이 책이나 노래로 만들어져 전해졌을 뿐 객관적인 사실과 역사적 고증은 전혀 없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이 '삼천'이라는 숫자가 어디서 나왔는지 추적해 보면 옛 중국에서는 많은 수를 가리킬 때 '삼천'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었고, '궁녀'는 궁인을 잘못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역사자들도 있습니다. 왜 '많은 궁인'이 어느 순간 '삼천궁녀'가 되었을까요? 승자의 입장에서 패전국을 망신 주고 능욕하며 자신들의 승리를 당연시 여기도록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날 가짜 뉴스처럼 그럴싸한 이야기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자극적인 소재와 이야기로 잘못된 역사를 써 내려간 건 아닐까요?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해 멸망한 비운의 군주였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극진히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습니다. 왕위를 물려받고 백제의 개혁 단행하고 전투를 직접 지휘하던 용맹한 왕이었다고 합니다. 부여를 둘러보는 내내 그 어디에도 삼천궁녀에 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단지 제 기억 속 역사책과 따라 부르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절'에만 존재하던 왜곡된 '삼천궁녀' 였던 것이었죠.
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낙화암이었습니다. 낙화암은 부소산성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부소산성은 백제의 도성으로 그 일대는 당시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이라고 불렸습니다. 낙화암에서 백마강을 바라보며 패망한 나라와 당으로 끌려간 의자왕을 애통해하던 '많은 궁인'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끝까지 백제를 지키고 싶었던 그들의 마음을 잘못 쓰인 역사가 왜곡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래의 영상은 부여군에서 제작하고 백제문화단지에서 상영하던 '사비의 꽃'이란 애니메니션입니다. 이 영상을 보며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백제'를 한번 느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