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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내가 비건이 될 줄 몰랐습니다만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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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표고씨 Jan 24. 2021

소갈비 양념에는 소고기가 없다

생각보다 간편했던 채식의 세계

콩나물 무침, 꽈리고추 간장조림, 묵은지 들기름 볶음. 그리고 도토리묵에 고사리나물, 숙주나물, 시금치나물, 버섯볶음과 미역줄기 볶음까지. 본가에서 가져온 엄마 반찬들을 보면 친숙하기 그지없다. 채식을 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생각보다 밥상에 변화는 별로 없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채식의 민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식은 채식과 많이 닮아 있었다. 이렇게 근사하게 차려놓고도 양푼을 꺼내 고추장 슥슥 비벼 하루 세 끼를 먹었다.

단점을 하나 꼽으라면 나물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손이 많이 간다는 것이다. 이 정도는 30년 경력의 요리 베테랑에 산전수전 명절을 다 겪은 엄마니까 가능한 걸지도 모르겠다.

가끔 야채를 다듬다 보면 정신이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야채는 왜 이리 빨리도 시드는지 저번에는 부추 한 단을 다듬다가 한숨을 얼마나 내쉬었는지 모른다. 거기다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치는 순간 한 줌이 되어버리는 걸 보면 그나마 있던 열정도 함께 사그라든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겨우 이만큼.' 하며 허탈함을 느끼는 순간도 잦다.

조금 더 간편하게 맛있는 걸 먹을 순 없을까 하며 마트에서 양념장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소갈비 양념인데 고기가 안 들어가네?'

횡재했다 싶어 얼른 장바구니에 넣고 기쁜 마음으로 제품의 성분명들을 보는 뒤집기 여정을 이어갔다. 그 후로 돼지갈비, 양념치킨 소스들도 마찬가지였다. 고기를 따로 준비하기 때문일까 잠깐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이것저것 소스들을 사오기 시작했다.

만들어진 양념장을 이용해 요리하니 훨씬 간편하고 식탁이 풍성해졌다. 재료 준비부터 요리 완성까지 10분이면 되는 버섯 불고기라니. 양파를 썰고 대파, 당근, 버섯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양념만 부어주기만 하면 훌륭한 요리가 되어주니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특히 아무것도 하기 싫은 주말엔 더더욱 빛을 발했다.

처음엔 잘 차려놓은 밥상을 기록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었다. 매번 잘 먹고 사는지 걱정하는 엄마를 위한 몫도 있었다. 하나둘씩 찍어놓은 사진들이 쌓이기 시작하니 그 양이 꽤 되었다. 한 번은 친구에게 보여주었더니 혼자만 갖고 있는 게 아깝지도 않냐면서 타박을 듣기도 했다.

인스타그램에 가입을 하고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해보는 SNS에 어색스럽기도 했지만 추억을 남기기 위한 목적이 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쉽고 간편하고 맛있는 비건 요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졌다. 처음 비건을 검색했을 때 파스타와 샐러드볼을 보고 얼마나 당황스러웠던지. 안 그래도 비건이라는 명칭이 주는 낯섬도 있었는데 한식파인 나에게는 너무나 먼 거리감이 느껴졌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같은 이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채식도 친숙하게 먹어도 된다라고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 비건 생활에 뛰어들며 '뭘 먹어야 돼?' 하던 고민들을 덜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조금 더 비건 생활이 수월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레시피도 함께 올리고 있다. 잘 먹었다는 댓글을 받을 때면 괜스레 더 맛있는 걸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아무래도 해외의 비건 시장이 크다 보니 처음엔 인스타에도 대부분 외국인들이 찾아왔었다. 글을 이해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올리다 보니 어느새부턴가 한국사람들의 비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채식에 대한 관심도 증가와 함께 팔로워도 함께 늘어간 것이다. 팔로워라기보다는 왠지 모를 동지애가 느껴졌달까. 이렇게 많은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힘이 돼주었다.

가벼운 시작에 비해 어쩌다 보니 3년 차 비건이 되었다.

그리고 가볍기만 했던 비건 삶에 목적도 생겼다. 채식에 대한 어려운 이미지를 벗겨내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 친숙한 음식으로 누군가의 편견에 다가가고 싶다. 진입장벽을 낮추는데 기여할 수만 있다면 더더욱 열심히 달려보리라는 다짐을 하기도 한다.

나조차도 완벽하기만 한 비건은 아니다. 성분명만 보고 비건 제품이라고 인스타그램에 올렸었는데 제조 과정에서 이용되는 동물성 제품을 모른 채 이용한 적도 있었다. 잘못된 정보에 얼마나 죄송스럽던지, 그 후로는 더 꼼꼼히 찾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기도 하다.

여전히 더 성장해야 하고 배워야 할 지식이 너무 많다. '비건'이라는 이름을 떳떳하게 쓰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지만 완전한 비건으로 살아가려는 시도와 노력을 담아내고 싶다. 조금 실수하더라도 내가 지향하는 지점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용기를 가지고 힘을 나눠주어야지 하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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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건이 될 줄 몰랐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