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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표고씨 Jan 31. 2021

언제부턴가 만나자는 연락이 두려웠다

비건이라고 커피만 먹어야 했을까?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너 학교에서 심어둔 NPC 지?"


  대학생 시절 수업이 없어도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고 새벽같이 일어나 도서관으로 향했었다. 공부가 좋아서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학교 정문에 길게 뻗어있는 메타세쿼이아 길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상쾌한 기분인지.  


  [행복한 공간에 입장하였습니다.]라고 머릿속에 안내문이 뜨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과 만나는 시간이 좋았다. 함께하는 활발한 활동들을 사랑했다.  MBTI로 말하자면 나는 전형적인 ENFP였다. 학과 활동, 동아리, 대외활동 이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싶었다. 물론 편입을 하고 싶다는 목표도 있었던 터라 학점도 신경을 써야 했으니 계속 학교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험 기간이 아니어도 남아있는 변명을 하자면, 그저 학교의 활기찬 분위기를 좋아했다. 


  팀 프로젝트를 해야만 하는 수업들로 시간표를 꽉꽉 채우기도 했고 그도 모자라 어떤 모임이 생겼나 하며 매일같이 학교 게시판을 둘러보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건 나에게 꼭 잡아야만 하는 기회처럼 느껴졌다. 삶의 영역을 넓혀가는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비건이 되고 나서는 많이 달라졌다. 


   매번 친구들에게 “밥 한 끼 같이 먹자!” 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식사 약속이 잡힐까 봐 걱정 아닌 걱정들을 했다. 이런 걱정에 비하면 결혼식 뷔페는 정말 정말 최상의 코스였다고 생각한다. 


  한 번은 비건 식당이 근처에 없어서 그나마 잘 알아보고 갔던 식당이 있었다. 비건이라고 이야기하며 햄, 고기, 달걀들을 빼주실 수 있는지를 먼저 여쭤보았다. 그리고는 샐러드와 알리오 올리오를 시켰다. 배가 고파서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접시 한 가득 하얗게 뿌려진 치즈를 보고는 깨달았다. 


  ‘사람들은 비건에 대해 잘 모르겠구나. 내가 더 조심해야겠다.’  




  그 후로는 대부분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밥을 미리 집에서 먹고 나가서 아메리카노 한 잔에 수다를 떠는 것이 서로에게 가장 좋은 선택지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매번 비빔밥을 먹으러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때문에 친구들과 새로운 맛집을 찾아다니며 함께 즐기던 추억들은 사라져만 갔다. 친구에게도 나에게도 미안한 마음 뿐이었다.


  그러던 중 대학교 친구들과 경기도 아주 끝자락으로 글램핑을 가게 되었다. 실은 약속이 잡히기도 전부터 먹을 것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식당에 가서 먹어야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싶었다. 나로 인해 친구들의 선택지가 줄어드는 건 너무 불편했다. 무언가 최선의 방안을 마련하고 싶었다. 도시락을 싸가야 하는지 아니면 서브웨이에서 베지 샌드위치라도 사가야 하는지 머리는 아파오고 여행은 걱정 투성이었다.




  어느덧 여행 날이 되었다. 여느 때처럼 먼저 장을 보기 위해 대형마트로 향했다. 점심 즈음에 만나 모두들 배가 많이 고픈 상태였다. 먹잇감을 찾는 하이에나들처럼 눈앞에 보이는 빵집으로 자연스레 발길을 옮겼다. 들어가자마자 가게를 꽉 채운 버터 향기에 취하는 느낌이었다. 이것저것 맛있어 보이는 것들을 집는 친구들 사이에서 혹시나 하는 헛된 희망으로 한 바퀴를 휙 돌아보았다. 양 손 가득 빵을 들고 나오는 친구들과 달리 털털한 빈손뿐이었다. 다시금 걱정이 시작되었다.


 ‘아, 이러다 오늘 굶는 거 아니야?’  




  아무 희망 없이 돌던 푸드코트에서 유부초밥을 발견하고 구원을 받은 느낌이었다. 정말 유부에 밥만 들어간 유부초밥이라니. 세상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믿지도 않은 신을 찾으며 감사해야 했다. 배가 얼마나 고팠는지 당장 이것부터 계산해서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행복한 얼굴로 친구들이 고기를 살 동안에 각종 버섯과 쌈채소들을 먼저 챙겼다. 그리고 장을 보고 돌아와 차 안에서 먹었던 유부초밥은 진짜 꿀맛이었다. 아직도 생각이 날 정도로 말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허겁지겁 여러 개를 집어먹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준비한 대로 저녁엔 바비큐 파티를 했다. 먹을 수 있는 거라곤 야채와 새송이버섯뿐이었지만 매일 먹던 버섯도 불에 구워 먹으니 너무 맛있는 요리가 되었다. 생각보다 맛있어서 다들 깜짝 놀라며 좋아했다. 나도 통 버섯 구이가 이렇게 맛있는 건지 몰랐다.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 알았더라면 더 샀어야 했는 데하며 아쉬워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더 좋았기도 하고 말이다. 





  머지않아 또 한 번의 캠핑이 있었다. 이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 더 능숙하게 장을 보게 되었다. 이번엔 그 사이에 시판된 비건 라면과 비건 함박스테이크도 구입했다. 걱정만 가득했던 전과는 달리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여행이었다. 성공한 여행의 반은 먹는 즐거움 아니던가.


  고기를 굽는 불판 옆에 조그마한 호일을 놓고 비건 함박스테이크를 구웠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친구들도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사흘은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매번 입이 짧은 편에 속했는데 이렇게 잘 먹는 줄 몰랐다며 친구들도 어이없어하곤 했다. 서로 눈치 보지 않아도 각자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비건 친구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라며 바비큐를 권하고 다녔다. 



   돌이켜보니 각자 자기가 먹을 것을 사고 또 함께하는 시간들이 서로에 대한 배려였음을 알게 되었다. 다른 가치관을 가졌더라도 함께할 수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낀 날이었다. 


  존중과 배려란 희생과 인내가 아닌 서로의 영역 안에서 새로운 교집합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그들도 처음 맞이했던 비건과의 여행처럼 함께 세상에 함께 녹아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계속 점차 넓혀간다면 죽기 전의 내 삶은 꽤나 멋져질 것만 같았다. 


  이제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 누군가가 또 옆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줄테니까. 점점 우리가 만드는 세상은 넓어지고 함께할 수 있는 영역이 늘어나겠지라는 생각을 하면 조금 더 삶 속에 뛰어들고 싶어 진다. 언젠가는 이 책을 읽는 누군가와도 식사를 할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행복한 상상 속에 글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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