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한 소화제와 작별하기
‘고기-보’로 살았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체증이 쉬이 내려가지 않았다. 그게 고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고기를 먹어야 건강해진다고, 튼튼해진다고 들어오지 않았던가. 체를 할 때마다 그저 내가 급하게 먹어서, 식탐이 과해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30년 간 한방 소화제, 양약으로 된 소화제, 물약 등 안 먹어본 약이 없을 정도로 위장이 많이 좋지 않았다. 위장 기능을 강화시켜준다던 한약은 거의 인생 필수품이었다.
어릴 때는 아빠를 따라 체를 내리는 곳에 자주 갔었다. 허름한 골목에 있는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인자하신 할머니가 배를 스윽 문질러주곤 하다가 목구멍에 손을 넣어 스스로 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병으로 된 콜라에 빨대를 꽂아 꼭 한 병씩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곳에 다녀오면 묘하게도 막힌 무언가가 뚫리면서 체증이 싹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었다.
뉴스 기사에서 '체 내림'이라는 것이 불법적인 사기 행위라는 걸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잊지 못할 평생의 은인 같은 분이셨다. 커다란 덩어리가 빠지는 걸 눈으로 봤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플라시보 효과였다니...? 뻥 뚫린 듯한 속으로 시원한 콜라를 마시면 온 몸이 관통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는데 추억이 또 이렇게 사라졌다.
아무튼 비건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시기도 몸이 많이 좋지 않았다. 7년 간의 수험생활로 인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몸만 남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매일 적게는 7시간에서 많게는 14시간씩 앉아서 공부하던 버릇이 나를 야금야금 잡아먹고 있었다.
시험이 끝날 때마다 한 두 달씩 했던 운동으로 빠져버린 근육이 쉽게 돌아 올리도 없었다. 그마저도 유산소가 전부였으니 근육이 돌아올 리 없지 않은가. 수험생의 마지막에는 디스크가 터졌나 싶을 정도로 1시간을 앉아있기가 괴로웠다. 30분을 앉아서 공부를 하면 허리 아래쪽으로 찌릿함이 올라와서 서서 공부를 하기도 했고 1시간을 그렇게 버텨내고 나면 30분은 누워서 쉬어야 그나마 허리가 버틸 수 있었다.
마지막 시험을 2주 앞두고는 정말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오른쪽 다리가 저리기 시작하더니 다리가 의자에 닿기만 하면 견딜 수 없이 아파서 침대에 누워 다리를 들고 문제를 풀었었다. 시간이 아까워 2주만 버티고 병원에 가야지 했었는데 동생 손에 이끌려 간 병원에서는 '대상포진'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그때도 아픈 몸보다는 앉아서 시험을 볼 수 있는지가 제일 걱정이었다. 내가 내 몸을 챙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주어지는지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내가 나를 위해서 한 일이라곤 소화가 안 되는 몸으로 고기를 꾸역꾸역 먹고 체하는 일이 전부였는데도 그 시기의 나는 괜스레 억울했다.
그렇게 채식을 시작하게 되었다. 더 이상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먹고 싶다는 생각보다 거부감이 앞섰다. 맛있다는 생각이 들기보단 저걸 먹으면 또 아프겠지라는 생각이 먼저 스쳐 지나갈 정도로 그렇게 몸이 먼저 거부를 했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고기 몇 점을 먹으면 그날은 하루 종일 체증으로 머리가 아프거나 토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놀랍게도 채식을 시작하고선 체하는 일이 없었다. 아주 과하게 먹어도 돌아서면 배가 꺼지는 기이한 현상이 남았을 뿐이었다. 소화가 생각보다 빨리 되니 먹는데 부담이 없었고 무엇보다 즐겁게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부작용으로 밥을 더 많이 먹게 되었지만, 그래서인지 부모님께서도 걱정을 덜 하셨던 것 같다.
아직도 평범한 사람들 기준에서 보면 건강한 편은 아니다. 여전히 앉아서 하는 일이 괴롭기도 하고 근력부족으로 생수병 뚜껑도 가끔 친구들에게 부탁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여유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유도 모른 채로 좋지 않은 위장을 탓하며 살아갔을 때와는 너무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플 때 나를 탓하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던 안 좋은 삶의 방식들을 떼어내어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가는 법을 배워가는 시기인 듯하다.
코로나 핑계로 운동을 게을리하긴 했지만 산책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녹음이 우거진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비가 내리는 바깥은 얼마나 차분한지. 눈이 내리는 날의 바닥의 질척임까지 행복으로 다가오는 요즘이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천천히 내 삶의 최선의 방식들을 다시 찾아가는 중이다.
처음에는 조급한 마음에 급하게 근력운동을 시작하기도 했었다. 늦은 만큼 더 빨리, 더 많이 하면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해왔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시험에 실패할수록 나는 나를 더 다그치는 법을 연구해야만 했으니까. 그러다 보니 하루 운동하고 이틀은 끙끙대며 앓아눕기 바빴다.
운동장에서 쌩하고 달려가는 이들을 보며 나도 빨리 저렇게 뛰어야지 하며 마음만 조급했던 날이었다. 신체 나이로는 거의 60대 일텐데 청춘의 꿈을 꾸었으니 더 고생할 수밖에 없었지 않을까. '이제는 젊음이 부럽네-' 하는 어느 노인처럼 이야기를 하고 바삐 달리는 이들을 지나가긴 하지만 말이다.
아직은 애매한 어느 날의 봄날이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피어나는 새싹들처럼 나도 어느샌가 더 건강하게 더 가볍게 세상을 살아갈 날들이 기다려진다. 혹시 모른다. 다가오는 봄에는 쌩쌩 달리는 건 아니더라도 가벼운 뜀박질 정도는 가능하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