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표고씨 Apr 03. 2021

30분을 찾아 헤맨 가게가 사라져도 그럴 수 있지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일

  서울에 갈 일이 생겼다. 


  주말에 비를 앞두고 있어서 벚꽃이 지기 전에 얼른 다녀올까 하는 생각에 서둘러 약속을 잡았다. 산책을 빼고는 집 밖을 나가지 않았던 나에게 벚꽃 구경은 정말 큰 마음을 먹어야만 했다. 차가 조금 밀리고 답답한 버스와 마스크의 합작으로 멀미를 했지만 그래도 순조로운 오후였다. 날이 흐렸지만 선선해서 걷기 좋았다.      


  아침에 간단히 과일만 먹고 나왔기에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원래 가려던 밥집은 버스를 내려서 또 지하철을 갈아타고 30분은 더 가야만 했다. 중간 지점쯤 왔을까. 결국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근처의 음식점을 검색해보았다. ‘땡땡동 비건’, ‘땡땡동 비건 맛집’, ‘땡땡동 채식 식당’.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아 예전에 친구가 가봤다던 채식 옵션이 있는 비빔밥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예상보다 한참을 더 걸었다. ‘전에 갔을 때는 이렇게 골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라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골목골목을 들어가서 도착한 곳에는 누가 봐도 가게를 닫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정돈되지 않은 가게 앞마당이 우리를 반겨주었으니 말이다.     


  밥 한 끼를 먹겠다고 이렇게 멀리 걸어왔는데 허탈함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쨌든 우리는 밥을 먹어야 했고 다시 원래 가려던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또 걸어서 30분 거리. 가는 길에 벚꽃 길을 가로질러 구경하며 걸어가자던 그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에겐 배고픔에 의해 본능적인 움직임만 있을 뿐, 제일 빨리 오는 버스를 타고 자리를 옮겼다.     




  원래의 목적지였던 망원동에 겨우 도착했다. 그런데 브레이크 타임이라뇨. 시계를 보니 또 마의 30분이 남아있었다. 근처에 있는 벚꽃 길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조금 걸어갔다 다시 돌아왔다 계속 가게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1등으로 들어가 누구보다 빠르게 주문을 마치고 나서야 서로를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이런 일이 일상이라는 듯이. 



     

  비건을 하고 나서 조금 더 삶에 관대해졌다. 아무리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걸 어제와 같은 일로 몸소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채수를 사용한다고 해서 마음 놓고 갔었던 죽집이 며칠 전에 다시다 육수로 바꿨다든지, 아니면 두부 짜글이 집에서 두부 밑에 깔린 수많은 멸치들과 눈이 마주쳐서 어이가 없었다 하는 이야기들. 우스갯소리로 나누는 일들 속에서 ‘그럴 수도 있지.’를 터득해가는 느낌이다.     


  말 그대로 온순한 초식동물이 되어간다. 요리를 하면서도 삶이 그렇게 급하지도 않다는 걸 배운다. 채소를 다듬으며 모든 것은 내 손으로 직접 해야 하는구나를 깨닫기도 한다. 내 인생을 책임지기 위해선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하며 나를 건강하게 하는 것 또한 내 몫임을 부쩍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거기다 배고플 때 길거리에서 파는 찐 옥수수가 얼마나 귀한지, 귀찮은 날엔 찐 감자와 에어프라이어에 돌린 군고구마가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는지 사소한 것들에도 감사를 표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목적지는 캐나다 퀘벡에 계신 할아버지의 집을 옮겨놨다던 곳에 가게였다. 들어가자마자 이국적인 분위기에 감탄하고 비밀스럽고 따스한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허름한 골목에 있던 조그마한 공간이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뛰어들게 했다. 


  가게만큼이나 정갈한 메뉴판을 보고 친구와 나는 서둘러 주문을 했다. 왜냐하면 5시에 땡 하고 들어간 팀이 세 팀이었기에 누구보다 빠른 손길로 주문을 마쳤다. 너무 배가 고팠기에 뭘 찾아볼 여력도 없이 맛있어 보이는 것들 여러 개를 주문하고 나서야 물을 마실 수 있었다. 


  기다리던 스파게티가 나왔다. 재료는 버섯, 오일, 면 이렇게 딱 세 가지로 간단해 보였는데 어떻게 이런 깊은 맛이 나고 간이 딱 맞는지 돌아와서까지 친구와 진짜 고수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갖은 재료들을 배합해서 만드는 요리도 정말 근사하지만 이렇게 몇 안 되는 재료들로 본연의 맛을 잘 살릴 때 요리사님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함께했던 피자도, 또 다른 파스타도 정갈하고 검소한 느낌이 들어 너무 좋았다. 정말 가정식답게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점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통통하게 부른 배를 두드리며 흡족한 얼굴로 길을 나섰다. 연신 감사함을 표하며 나올 때까지 흐뭇한 만남이었다. 그리고 잠깐이라도 소화시킬 겸 걷기 시작했다. 버스를 바로 타기엔 너무 무리가 있었다는 판단에서였다. 


 길을 가다 우연히 벚꽃이 가득한 길을 만났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모여있는 곳에 도착해 둘러보니 우리가 가려고 예정해 놨던 곳이었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로 우리는 오늘의 행복을 2021년 마지막 벚꽃에 두고 왔다. 오가는 차를 피해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틈으로 벚꽃들을 눈에 담았다.


  인생은 이처럼 예기치 못한 곳에 선물을 숨겨 놓는 듯싶다. 마치 내가 비건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집착을 내려놓을 때 진정한 행운을 만난다는 말이 있다. 손에 꼭 쥐려 하지 않아도 얻게 되는 그런 행운들을 만날 때마다 삶의 경이로움에 감사를 느낀다. 앞으로의 시간도 인생 곳곳에 숨겨진 감사한 일들을 발견하는 날로 채워가지 않을까 싶어지는 밤이다. 





이전 17화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비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