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표고씨 Apr 02. 2021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비건

정말 바쁜데 정말 살만한 하루

 아침에 일어나서 따뜻하게 차를 데운다. 


  보통 아침 식사는 슈가 스폿이 잘 올라온 바나나를 기본으로한 여러 개의 과일과 견과류로 대신한다. 전에는 바나나와 제철 과일들로만 아침을 먹곤 했었는데 어느샌가 함께 먹기 시작한 견과류만 5가지가 되었다. 


  건강을 위해 추가한 캐슈너트, 아몬드, 호두, 브라질너트, 마카다미아. 과일만 먹었을 때는 차가운 느낌이 강했는데 고소한 맛까지 더해지니 가볍고 든든한 식사가 되었다. 보통은 식탁 위에 올려놓은 믹스 넛트를 한 주먹 집어먹는 것으로 아침을 마무리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장보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먹고살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 되었다. 급한 대로 시켜먹을 수도 없으니 나는 이걸 ‘생존 요리’라 부르고 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저절로 숨을 쉬는 것처럼 이것도 나름 3년 차가 되니 자연스러운 행동이 되어간다. 언젠가부터 장보기 노하우가 생겨 이제는 무엇을 사야 하는지 엄청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또한 감사한 일이다. 정말 자연스럽게 오늘 먹을 것을 떠올리며 장바구니를 채우게 되다니. 간단한 국이나 반찬을 떠올리고 냉장고에 없는 야채를 사거나 새롭게 나온 제철 채소들을 고르는 그런 감각을 배우게 된 것이다.





  점심은 간단한 아보카도 비빔밥으로 정했다. 밖에서 아보카도 샐러드를 먹었을 땐 엄청 간편해 보였었는데 일단 아보카도를 후숙 시키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실온에 둬보기도 하고 냉장고에서 익혀보기도 하고 익은 아보카도를 파내어 얼려보기도 하고. 부푼 기대로 반을 쪼개었을 때 썩은 아보카도가 나오는 그 당황함이란.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것만 해도 10개는 넘을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잘 익은 아보카도를 골라내고 상추, 깻잎, 배추, 케일과 같은 야채를 씻어낸다. 그리고 물기를 털어주고 잘게 썰어내고 함께 곁들일 찬을 고른다. 


  아보카도와 잘 어울렸던 조합은 김치볶음 또는 간장 버섯볶음 정도가 있었다. 특유의 느끼함을 잡아줄 짠맛과 약간의 단맛이 야채와 아보카도 그리고 밥과의 조합을 잘 맞춰주는 느낌이다. 이번에는 특별히 간장에 잘 졸여낸 연근 조림을 선택했다. 



  간단한 요리라고 말하지만, 전혀 간단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나름의 규칙을 발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채식도 단짠단짠이 진리라던가... 


  배추와 무는 시원한 맛을 내기에 좋고 제철 채소는 그냥 씻어서 산채 비빔밥을 해도 좋았다. 그리고 봄나물은 향긋해서 간단히 데치는 것만으로도 상이 풍성해지고 밥상이 허전하다 싶으면 두부를 살짝 데워 밥상에 함께 내온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에는 에어프라이어에 버섯을 구워도 좋고 삼삼한 된장국 하나만 있어도 하루는 거뜬히 보낼 수 있다. 




  어렸을 적 가벼이 먹던 반찬들은 부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나의 할머니와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시간을 오래 보내야 하는 요리일수록 더 그렇다. 야채들이 익어가는 시간 동안 나는 그 옛날 그들의 모습이 된다. 어떤 생각으로 그들이 불 앞에 서있었을지 작은 머리로나마 가늠해보는 것이다. 


  '꽈배기 모양 곤약 하나를 만들어내며 이렇게 많은 정성이 필요했구나.' 느끼는 날엔 그저 가만히 마음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구나 싶어서 괜히 불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날도 많았다. 보잘것없고 잘난 것 하나 없는 내가 뭐가 예쁘다고...      


  한평생을 사랑을 담아 키워주신 외할머니가 떠오르는 날이면 그런 생각을 한다. 물려주신 몸이라도 예쁘게, 건강하게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다가 떠나면 그걸로 할머니는 참 기뻐하시지 않을까. 


  그래서 스스로를 더 아끼고 사랑하려고 한다. 받은 사랑만큼 돌려드릴 순 없지만 그 값은 해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내 마음 하나 편하고자 하는 일이겠지만 나름대로 할머니의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합리화를 하고 있다. 더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귀하게 받은 사랑을 나눠줄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일 테고 말이다. 






  비건 인스타를 운영하며 사람들에게 더 다양한 요리로 새롭게 다가가고 싶어 매일 요리법들을 뒤적여 본다. 때로는 어머님들의 건강식을 찾아보기도 했다가 이유식으로 눈을 돌렸다가, 요즘은 자취생들이 간편하게 먹는 요리를 찾아보기도 한다. 적어도 요즘 유행이다 싶은 음식은 직접 해 먹어 봐야 직성이 풀리게 되었다. 이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생존이 취미가 되었다. 


  사진과 글로 전달하는 것도 좋지만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에 요리 유튜버가 되기 위한 도전을 하고 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요리하는 유튜버들의 영상을 찾아보고 편집 방법을 배우기도 하고 어떻게 비건과 논비건에게 다가가면 좋을지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기도 하다. 




  내게는 연이은 수험생활의 실패로 바닥난 자존감만이 있었다. 합격을 해야만 바닥에 떨어진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기대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나와 미래가 바뀌어 가고 있다. 


  실은 내가 바라던 변화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나에게 관심을 갖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날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지 않을까. 집, 독서실 밖에 모르던 내가 이제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어우러져 무언가 더 나은 오늘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 


  정신없이 준비하고 먹고 치우고 하는 순간 사이에 인스타에 올릴 사진과 이야기를 떠올린다. 예전과는 달리 아주 비효율적이고 엉망이 돼버린 시간 속에서 나는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이 정도면 비건은 구렁텅이에서 나를 꺼내기 위한 누군가의 동아줄이 아니었을까.  


이전 16화 채식을 시작했을 뿐인데 돈이 쌓여간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