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 Dec 01. 2023

퇴사를 하고 떠난 유학에 실패했다.

캐나다에서 소프트웨어 공부를 했다.

브런치를 시작하며...


저는 도전과 포기를 반복하는 '연쇄실패마'입니다.


퇴사, 국제결혼, 캐나다 유학, 개발자 취업 실패, 포르투갈 데릴사위, 한국으로 역이민...


이를 두고 제 아버지께서는


"니 인생 참 파란만장한데 글이나 한 번 써봐라."


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변변한 것 하나 이루지 못한 제 서른 살 인생에서 고통, 우울, 자기비판을 통해 얻을 깨달음을 브런치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운, 요행, 동기부여 따위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스스로 다시 일어서는 것. 


한 명이라도 제 글을 읽고 힘을 얻는 다면 참 보람될 것 같습니다.




2020년 11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다. 그때는 뭔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냥 그 일이 싫어서 도망친 것 같다.


사수가 나에게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생각난다. "넌 사회생활 한참 멀었어 새끼야." 그때는 속으로 욕했다. 자기는 뭐 얼마나 잘한다고. 사실 그의 말이 옳았다. 사회가 싫어서 이렇게 나왔으니.


주식이니, 구매 대행이니 스스로 돈 벌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했다. 나도 사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유튜브에서 보니 다들 잘만 하는 것 같던데. 한두 달 대충 찌그려보다가 안될 것 같아, 또 그만두고 다른 회사에 취직했다. 그 일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뭐 남의 돈 벌기가 쉬운 줄 알았냐?'


21년 여름. 아내와 결혼을 하고 함께 캐나다에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캐나다 공립 컬리지를 졸업하면 3년 동안 일할 수 있는 비자를 준다나?


소프트웨어가 유망하다는 소리는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다. 심지어 AI 특성화 학과였다. 어차피 와이프도 한국에서 일을 구하긴 힘든 것 같고, 나도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게 꿈이라니.


졸업 후 초봉 7천 정도 받으면서 사는, 성공적인 이민 라이프를 꿈꾸며 캐나다행 비행기를 탔다.


테슬라에 투자해 벌어들인 2천만 원과 부모님께 지원해 주신 3천만 원, 도합 5천만 원을 거머쥐고 이민에 도전했다. '아 부모님 감사합니다. 실망시키지 않게 죽도록 열심히 할게요.' 그게 초심이었다. 다짐과 실행은 하늘과 땅차이인데, 나는 또 나에게 속았다.


...


학교를 다니며 파트타임으로 돈도 벌도 열심히 살아야지. 그래야 했는데. 과제를 쳐내기에 급급했다. 영어로 수업을 들으며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성적은 꽤 잘 나와서 부모님께 자랑도 했다.


코로나로 첫 해 동안은 집에서 수업을 들었다. 딱히 친구를 사귀지도 못했다. 분명 성적도 잘 나왔는데, 딱히 뭐 할 줄 아는 것은 없었다. 뭐가 문제지. 아 코딩을 할 줄 안다고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구나. 깨달음. 이거 뭔가 교육 방식이 잘못된 것 같은데? 이게 맞나? 근데 뭐 그렇다고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비자받으려면 졸업해야지. 졸업하고 인턴을 하면 되겠지. 그때는 뭔가 다를 거야.


22년 여름 방학. 유럽으로 여행을 갔다. 아내는 캐나다에서 일을 구했고, 나는 여전히 학생. 그런데 세상이 무섭게 변한다. 전쟁이 터지고, 경기 침체가 오고, 또 대기업들은 줄줄이 대량해고를 하네... 나 좆된 거 아닐까? 내 인생 여기 다 걸었는데.


주위 사람들은 "야 너는 참 도전하면서 사는구나, 멋지다."라고 말했지만 어쩐지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글쎄... 그래서 내가 이룬 게 뭐가 있는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를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다.


23년 봄. 세상은 AI 열풍이다. AI 쪽으로 일자리가 많아지려나 싶었다. 알아보니 이쪽은 석사 이상부터 뽑던데..?


'컬리지 디플로마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23년 5월.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하기 2개월 전부터 꾸준히 이력서를 돌렸지만 인터뷰를 보자는 곳은 없다. 사실 나도 알고 있다. 지금 인력 시장에서 나는 가치가 없다는 것을.


나보다 경력 좋고 잘하는 사람들도 일을 못 구해 우는 소리를 내는 판이다. 그래 그럼 뭐라도 만들어 보자. 같이 학교를 다니던 형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주 2,3회씩 만나면서 열정적으로 스타트업이라도 해보자.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어려운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백사장에 만든 모래성처럼. 내 결심은 형체를 잃어갔다. 아 또 나는 흐지부지하는구나. 왜 끝까지 뭔가 해내는 게 없지?


'미안해요 형. 괜히 부추겨서. 나는 먹고살기 힘들어서 다른 일을 구해볼까 해요.'


커스터머 서비스 일을 구했다. 영어로 고객 상담을 하다니. 전화를 받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 거린다. 너무 하기 싫다. 또 이런 느낌이군. 일하는 시간 동안 영혼이 닳아 가는 느낌.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견디면서 돈 벌어. 불평 그만하고 일해. 너 가장이잖아 좀 책임감 있게 일하라고.'


23년 9월 말. 5월에 했던 와이프의 비자 연장 신청이 거절되었다고 연락을 받았다. 와이프는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한국에서 가져왔던 돈은 학비로 절반을 썼고 나머지는 진작 생활비 렌트비로 썼다. 돈이 말라 갈 때쯤부터 와이프가 일을 구해 번 돈으로 우리는 생활하고 있었고. 생활비가 너무 비싸 저축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상황이었다. 와이프는 절망하고 울었다.


'미안해 여보. 병신 같은 신랑 만나서 고생이 많네.'


내 월급은 아내 월급의 6-70 퍼센트 수준. 여기서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거리로 나앉겠구나.


우리는 캐나다 생활을 접고 포르투갈로 피신하기로 했다. 가지고 있던 가구, 물건들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자금을 마련했다. 다니던 회사에 사정을 말하고 떠나기 일주일 전까지 일했다. 틈틈이 포르투갈어를 유튜브로 배웠다.


23년 10월 중순. 포르투갈로 떠나는 비행기를 탔다. 안녕 캐나다. 토론토에만 있다가 가네, 하하.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포르투갈에서 나는 뭐 하고 살지? 제대로 대화도 혼자 못하는데. 그래도 주저앉아 있을 순 없잖아.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함, 스스로를 향한 실망, 세상을 향한 분노 말고는 내게 남은 게 없다. 건강을 챙기자. 좋은 아들, 남편이 되자. 좋아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자. 돈을 벌고 책임을 지자. 뭐라도 좀 끝까지 해보자.


"영아, 니 인생 참 파란만장한데 글이나 한 번 써봐라."

전화 통화 중에 아버지께서는 지나가는 투로 말씀하셨다.


그렇게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