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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Dec 19. 2023

포르투갈에서 잠깐 살고 있다. (4)

시골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방법


우리 부부가 신세를 지고 있는 외삼촌댁은 비다고(Vidago)라는 마을에 있다. 비다고는 포르투갈의 북동쪽에 위치한 산간 지방의 작은 마을인데, 인구가 대략 1000명 남짓하다. 한국으로 따지면 읍, 면, 동의 아래인 '리', 즉 비다고-리 정도가 되겠다.



비다고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포르투(Porto)까지는 고속버스를 타고 두 시간 반정도 가야 한다. 오히려 스페인 국경이 더 가깝다. 마을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로 나가기 전까지는 구불구불한 산길의 연속이라, 안 하던 차멀미도 생기곤 한다.


내가 여기서 유일한 아시아인인 줄 알았는데, 이 외진 곳에도 한 중국인 가족이 잡화점을 운영하며 잘 살고 있다. 정말 대단한 민족이다. 한 번씩 그 가게에 들를 일이 생기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호기심인지 반가움인지 모를 눈빛을 받곤 한다. 아무튼 아쉬운 대로 나는 이 마을의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것 정도에 만족한다.


'뭘 이런 걸로 자존감을 채우고 앉았는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마을의 중심에는 큼지막한 언덕이 자리해 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으로 뒤덮인 언덕을 오르면 제법 숨이 찬다. 경사가 제법 가파른 언덕의 꼭대기에는 종탑과 예배당이 있는 널찍한 공터가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동네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성당의 삼종기도 시간(아침 6시, 정오, 저녁 6시)이 되면 종탑에서부터 종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진다. 여러모로 시선을 잡아끄는 곳이다.


언덕 아래에는 시외버스가 지나다니는 큰 도로가 있고, 그 길 주위로 나란히 약국, 식당, 정육점 등의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외삼촌댁에서 이 상점 거리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데, 아내와 나는 매주 두세 번 이곳을 오가며 장을 본다. 낮 시간에 가장 사람들이 붐비지만, 점심시간인 오후 1시 30분부터 3시까지는 식당을 포함한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 따라서, 점심으로 외식을 하고 싶다면 1시 전에는 식당에 들어가야 한다.


이 마을에서 가장 한산한 곳은 빨래터와 놀이터다. 빨래터는 세탁기가 보급되고 난 후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고, 놀이터는 놀 만한 어린이들이 별로 없는 탓이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드문 드문 보이는 것이 꼭 전설의 포켓몬 같다.


비다고에는 나보다 어린 사람을 찾기 힘들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자리를 찾으러 대도시나 해외로 떠났다. 지방 소멸과 인구 고령화는 일정 수준 이상의 문명에서 피할 수 없는 현상인 듯싶다.

마을 규모에 비해 소방서가 굉장히 큰데, 이전에 있었던 큰 산불의 영향이라고 한다. 화재가 남긴 또 다른 흔적들로는 마을 중심에 있는 소방관 동상, 까까머리를 하고 있는 여러 산들, 불에 타버린 채로 방치되어 있는 커다란 호텔등이 있다.

...


아무튼 이 시골 마을에는 딱히 구경할 거리나 즐길 거리가 마땅치 않다. 바로 이전에 지내던 곳이 토론토라서 그런 부분이 더 크게 다가오는 면도 있고. 도시인의 입맛에는 느리고 불편하며 따분한 곳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기로 했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에는 그냥 쪼그려 앉아 달팽이가 기어가는 모습을 몇 분동 안이나 지켜본 적이 있다.


그 달팽이를 보니 누나 생각이 났다. 지금이야 머리가 굵어 따로 살지만, 과거 한 지붕 아래에 살 때 우리 누나야는 예전에 달팽이를 키우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교감도 할 수 없는 생물을 무슨 재미로 키우는 것일까? 심지어 보고 있으면 답답한 마음이 들어 괜히 참기름에 볶아 먹자고 누나에게 짓궂은 농담을 던지곤 했다.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흘러, 타지에서 비 오는 날 쪼그려 앉아 달팽이가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느릿느릿하게 움직여도 잘 먹고, 잘 살고, 벽도 잘 타는 달팽이를 보니, 마음 한 구석이 차분해지더라.

...


시골에 있는 백수는 그야말로 한량이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오늘이 월요일인지 일요일인지 하면서 하루를 보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인생에 얼마 없을, 어찌 보면 선물 같은, 이 조용한 나날들을 마음 깊이 새기며 온전히 즐기는 것도 커다란 의미가 있겠다마는, 생산적이고 발전적이지 못한 하루를 보내면 으레 죄책감 비슷한 기분이 든다.


아마도 게으름을 죽이고 부지런히 살면 그런 죄책감을 느낄 겨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 게으른가 보다.


그런 죄책감을 이겨내고자, 매일 조금씩 자기 관리 비슷한 습관을 들이는 중이다. 딱히 뭐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것은 아니라 루틴이라고 부르기는 민망하다.


나는 보통 여섯 시쯤 눈을 뜬다. 정신이 들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눈을 감은 채로 침대 옆 서랍 위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는 것이다.


휴대폰을 켜고 시간을 확인한다. 다섯 시보다 이른 시간이면 다시 잔다. 무슨 꿈을 꿨던 것 같지만 딱히 기억은 안 난다. 그다음으로는 이메일,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등의 알림을 확인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행동으로는 딱히 권할 만한 일은 아니다. 눈 주위를 잔뜩 찌푸린 채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는 것, 눈에도 안 좋고 뇌에도 안 좋을 것이다. 가끔은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휴대폰을 하며 보내고야 만다. 이 생활 습관은 고쳐야겠다.


'자기 전에 휴대폰을 침대에서 멀리 떨어진 컴퓨터 책상에 올려둬야겠다.'


이렇게 다짐은 하지만, 자기 전에 만지는 휴대폰이 가장 재미있는걸.


침대 옆에 벗어놓은 신발을 신고 화장실로 간다. 자고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오줌이 마려운 법이다. 만약 안 그렇다면 당신은 평소에 물을 더 마실 필요가 있다.


볼일을 보고 나면 따뜻한 물로 간단히 세안을 한다. 뻑뻑한 눈이 조금 나아진다.


해가 짧은 계절의 아침 일곱 시는 어둡고 춥다. 아침에 따뜻한 물을 마시면 좋다 하여, 차를 끓여 마시기 위해 냄비에 수돗물을 받아 가스 불에 올린다. 가스를 켜기 전에 창문을 살짝 열어 환기를 한다. 냉기가 들어오지만 어쩔 수 없다. 가스 냄새가 더 지독하기 때문이다.


침대에서 아직 자고 있는 와이프가 혹시 깰까 싶어 눈치를 힐끔 본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간단히 체조와 스트레칭을 한다. 뼈마디에서 풍선껌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근육이 이완하고 수축하며 온몸 구석구석 혈액 순환을 돕는다. 피가 빠르게 돌면서 뇌에 산소를 공급한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몸풀기를 마칠 때쯤, 냄비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물이 끓고 있다는 신호다.


재빨리 불을 끄고 티백을 냄비에 넣었다 빼거나 담근 채로 휘휘 젓는다. 이렇게 대략 2~3 분쯤 우려낸다. 연 노란빛으로 물든 찻물을 머그컵에 따른다. 더 길게 티백을 담그고 있으면 찻물은 짙은 갈색이 되고 떫은맛이 난다.


차를 마시는 동안에는 책을 읽는다. 아직 완전히 날이 밝진 않았지만 대강 활자를 읽을 정도는 된다.


방금까지 펄펄 끓던 물이라 천천히 호호 불어가며 마신다. 뜨겁게 달궈진 머그컵을 왼손 오른손 번갈아 잡으며 차가운 손을 녹인다.


책은 차를 한 컵 다 마실 시간 동안만 읽는다. 매일 이렇게 야금야금 읽는 게 어려운 책을 읽는 요령이다.


요즘 읽는 책은 리처드 C. 프랜시스의 '쉽게 쓴 후성유전학'이라는 책이다. 2021년 초쯤에 사놓고 이때까지 읽지 않았는데, 차마 버릴 수도 없어 가지고 다니기만 했다. 한국에서 샀던 이 서적은 나의 지적 허영심과 함께 지구 한 바퀴를 돌았다.


쉽게 썼다지만 작가 기준으로 쉽게 썼다는 것인지,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 아무래도 전문용어가 많이 등장해서 그런가 보다.


독서를 끝내고는 산책을 간다. 걷고 뛰기를 반복하며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것이다. 외투를 대충 껴입고 운동화로 갈아 신으면 준비 끝.


나와 아내가 먹고 자고 씻고하는 아늑한 반지하 원룸은 외삼촌댁 뒷마당에 출입문이 있다. 산책을 가려면 집주위를 둘러 앞문으로 나가야 한다.


집 앞 현관에는 외삼촌네가 키우는 개, 마이크가 있다. 흰 바탕에 검은 점박이인 이 녀석은 목줄과는 인연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뚱하니 쳐다보다가 내가 집 밖으로 나서면 그제야 쫄래쫄래 따라 나온다.


처음 며칠간에는 혼자 산책을 했었는데, 이제는 거의 매일 마이크와 함께 집을 나선다. 내가 달리면 함께 달리고, 멈춰 서서 사진을 찍거나 하면 멀찍이 서서 기다린다. 덕분에 뜀박질을 하는 시간이 늘어서 산책이라기 보단 조깅이 되어가고 있다.

만져주니까 잠들어버림

짧은 시간 동안에 벌써, 이 네 발 달린 짐승과의 동행이 익숙해져 버렸다. 이제 가끔가다가 혼자 산책을 나서는 날이면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섭섭한 기분이 들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개가 사람을 길들이기도 하는 것이다.


산책 코스는 그날마다 내키는 대로 가는 편이다. 동네 뒷산이나, 자전거 길, 밭을 따라 나있는 샛길 등 새로운 곳을 탐험하듯이 가보곤 한다. 마이크는 신이 나서 가는 곳마다 열심히 오줌을 뿌리고 다닌다.


동네 길을 따라 걸을 때는 집집마다 마당에 개도 있고 하여, 지나갈 때마다 개 짖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공연히 이웃들을 깨울까 싶어 처음에는 걱정도 되었지만,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한다. 시골에는 이런 것이 일상일 테니.


산책 중에는 마을 사람들 하나 둘 마주치게 되는데, 나는 매번 '봉디아(bom dia-좋은 아침)'하면서 먼저 인사를 건넨다. 그러면 '저 놈은 뭐지?'싶어 쳐다보던 사람들도 웃으며 '봉디아~'하고 인사해 준다.


이렇게 마이크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이 벌써 이 마을에 소문이 났다. 한 날은 와이프의 외숙모가 웃으면서 '처음 보는 사람이 너네 집 개를 데리고 산책하더라'라는 동네 사람들의 말을 들었고 하셨다. 동네가 작긴 작나 보다.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마이크가 마당에 발라당 눕는다. 목덜미와 배를 쓰다듬어 주면 헥헥거리다가도 금세 차분해져 손길을 즐긴다.


마이크를 한껏 만지고 나면 손에 개털이 잔뜩 묻어난다. 슬쩍 냄새를 맡아보면 개 비린내가 고약하다.


집으로 들어가서 손을 깨끗이 씻고 샤워를 한다.


내가 하루를 시작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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