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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이해에 획을 긋다, 1964년 니가타 지진

우리 주변 지구과학 이야기

by 전영식

니가타는 동해를 끼고 있는 일본 혼슈의 항구도시이다. 인구는 약 80만명(2020년)이고 동해 연안의 유일한 정령 지정 도시(정부가 정한 특별 도시라고 보면 됨)이다. 쌀이 맛있기로 유명한데 바로 ‘고시히카리’(越光·コシヒカリ)의 산지가 니가타이다. 쌀이 맛으면 술도 맛있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시나노강은 총길이가 367km인데 일본에서 가장 긴 하천이고 수량도 1위이다. 아가노 강과 함께 이 강이 퇴적물을 쏟아내서 일본에서 4번째로 넓은 에치코평야를 만들었다. 퇴적물로 강의 경로가 바뀌고 수심이 낮아져 수차례 항구의 위치가 바뀌었다. 우리에게는 '만경봉'호로 알려진 북송선이 출발한 곳으로 기억되는데 1959~1984년까지 187회에 걸쳐 93,340명이 북한으로 건너갔다. 그후 그들이 삶이 어떻게 됐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다.


니가타는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에서 개항된 5개의 항구 중 하나였다. 넓고 풍성한 수확을 주는 평야, 금, 석유 등 풍부한 천연자원, 풍부한 수자원에 따른 전력 공급 능력, 항구 등이 어울어져 니가타에는 석유화학 콤비나트 등 각종 시설이 들어서고 환동해경제권의 주축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니가타 시나노강 하구, ⓒ 전기주


니가타 지진


니가타 지진(新潟地震)1964년 6월 16일 13시 1분 니가타현 아와시마 남부 앞바다 40km에서 발생한 지진이다. 지진의 규모는 M7.5, 모멘트 규모 Mw7.6이다. 진원의 깊이는 34km였다. 큰 지진임에도 불구하고 인구밀집 지역이 아니어서 다행이 사망자 26명, 부상자 477명 발생에 그쳤다. 발생 직후 니가타시에서 4m의 큰 해일이 관측되었다. 이 쓰나미는 한국 동해안에도 영향을 미쳐 울산 39cm, 부산 32cm의 해일이 관측되었다.


이 지진은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석유 콤비나트 재해가 일어난 지진으로, 화학 소방 체제가 취약했던 시대여서 143개의 석유 탱크에 12일간 화재가 발생했다. 이후 석유 콤비나트 방재의 기준이 되었다. 또한 니가타 지진에서 매립지에 지어진 주거지나 공업지대의 액상화현상이 발생해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또한 일본에서 지진보험이 생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2년 후인 1966년 처음으로 일본에서 지진보험제도가 도입되었다. 1964년 니가타 지진은 지진이해 및 방재에 한 획을 그은 지진이라 할 수 있다.


지질학적 배경


1964년 니가다 지진의 진앙


혼슈 서북쪽 동해안 지역은 일본 해구를 따라 유라시아판 아래로 태평양판이 섭입하면서 생긴 배호분지(Back Arc Basin)의 열개(열림)로 형성된 동해의 동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이 과정은 마이오세 초기에 시작되어 마이오세 중기에 끝났다. 플라이오세 말기에는 지각이 압축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이즈-보닌-마리아나호와 혼슈의 충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열개지의 단층이 역으로 활성화되면서 단층으로 형성된 분지의 반전 현상이 일어났다.


현대 일본은 태평양판, 필리핀해판, 오호츠크판, 아무르판 사이의 수렴 경계 위에 있다. 섬 배호의 동쪽과 동남쪽 해안을 따라 발생하는 태평양판과 필리핀해판의 섭입은 각각 일본 해구와 난카이 해곡에서 일어난다. 동해와 접해 있는 혼슈 서해안은 유라시아판의 하위판인 아무르판과 북미판의 하위판인 오호츠크판(모두 대륙판)이 충돌하여 아무르판이 일본 밑으로 섭입되어 수렴하는 현상이 남북방향으로 일어난다. 이를 동해 동연 변동대(東海東縁変動帯)라고 부른다. 특히 이 변동대 경계는 동쪽으로 가라앉는 충상단층으로 구성된 초기 섭입대라고 보여지는데 아직은 확실한 이론은 없다.


동해 동연 변동대에서는 열개와 이어진 반전 현상 때문에 경계지역인 혼슈 서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규모 M6.8~7.9의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일련의 여러 단층이 생겨났으며, 이 단층은 많은 경우 지진과 함께 큰 쓰나미도 일으킨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지진으로 1741년, 1833년, 1940년, 1964년, 1983년, 1993년의 지진이 있으나 1741년 지진은 그 발생 여부에 대해 아직 논쟁중이라고 한다.


석유단지 화재


니쓰 유전지대, 1930년대, 출처: 위키미디어 Public Domain


니가타 역에서 남쪽으로 18km 정도 내려가면 언덕 지대에 니쓰 유전 (新津油田, Niitsu Yuden )이 있었다. 이 지역은 나라시대부터 자연적으로 석유가 누출되어 나왔는데, 1899년 기계를 이용한 석유굴착이 처음으로 시작됐고, 그 후 다이쇼 시대에는 일본 최대의 유전으로 성장했다. 1917년까지 최대 생산량은 120,000킬로리터에 달했다. 1996년 모든 유정이 폐정됐다. 참고로 일본의 석유매장량은 2016년 미국 에너지관리청(EIA)의 통계에 의하면 4만 배럴 정도라고 한다.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현재는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


이를 바탕으로 니가타에는 석유화학종합단지가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물로도 화재를 진압할 수 없는 석유화학시설 화재에 대한 소화장비가 전무했다. 그래서 하염없이 타들어가는 것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석유 콤비나트 화제에 대한 시나리오가 마련되었다.



액상화 현상


지진에 따른 액상화 현상이 널리 알려진 계기가 1964년 니가타 지진 때였다. 당시 시나노 강을 매립해 지어진 아파트나 빌딩이 통째로 넘어졌다. 지진 진동에 따른 구조물 구조의 붕괴가 아니었다. 니가타는 두개의 강이 만나는 삼각주 같은 곳이라 건물이 충적층 위에 지어졌다. 매립지는 땅값이 싸기 때문에 손쉽게 개발하기 쉬운 지역이다.


니이가타 지진의 액상화 피해 사진(1964.6.16), 위키미디어: Ungtss


1964년 6월16일 니가타현에서 규모 7.5의 강진이 발생했을 때, 강변 아파트 건물이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이 TV로 생중계됐다. 이 장면은 액상화의 교과서적인 사진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어떤 건물은 멀쩡한데 다른 건물은 완전히 넘어간 것이 보인다. 인근 석유 저장소도 순식간에 주저앉았다. 학계는 “지반이 액체 상태로 물렁해지는 액상화(液狀化) 현상 때문에 피해가 컸다”고 발표했다. 내진설계가 아무리 잘된 건물이라도 지반이 붕되면 넘어갈 수 밖에 없다.


액상화는 1953년 일본 학자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지진 때 지반 침하와 건물 붕괴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강한 진동으로 땅과 지하수가 합쳐지면서 지반이 반죽처럼 물러지는 현상이다. 흙·모래가 지표로 분출되거나 물이 뿜어져 나오기도 한다. 1964년 알래스카, 1976년 중국 탕산(唐山), 1995년 고베 대지진 때도 액상화가 피해의 한 원인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포항 지진 때도 이러한 현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액상화의 원리, 출처: 도쿄도 도시정비국 홈페이지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기록에도 언급되어 있다. 1643년에 ‘부산 동래 쪽에서 큰 지진이 발생했고, 경상도 합천의 초계에서는 마른 하천에서 탁한 물이 솟아 나왔다’, ‘울산에서 지진이 발생했는데 마른 논에서 물이 샘처럼 솟았고, 물이 솟아난 곳에 흰모래가 나와 1~2말이 쌓였다’는 기록이 있다. 서울에도 송파구나 강남구의 일부 지역, 지방 간척지의 매립지 등이 액상화에 취약한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액상화 현상이 나타난 지역에 건물을 지을 때에는 기초를 땅속 암반 깊숙이 고정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보통 기반암이 깊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매립지에 건물을 짓는 이점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 문제이다.


사도광산


사도 금광산 입구, 위키미디어: 番記者


니가타 앞바다에는 제주도의 절반 정도의 넓이를 갖는 제법 큰 섬인 사도섬이 있다. 여기에 광량이 많았던 광산이 있었는데 그게 그 유명한 사도금광산(佐渡金山)이다. 이 광산은 함금석영백 광산으로 에도시대인 1601년에 발견되었고, 에도시대 초기 였던 전성기에는 금을 년간 400kg, 은은 40톤 정도 생산하던 일본 최대의 금광산이었다.


사도광산에서 채취한 은은 '세다은'으로 불렸으며, 조선에서 전례된 회취법에 의해 정련되어 긴자로 보내져 화폐로 만들어졌다. 이 광산에는 1939~1945년까지 약 1,519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노역에 동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본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고 몇차례 시도했으나 우리의 반대로 실패했었다. 한일관계 회복 차원에서 우리 정부는 문화유산 등재에 조건부로 동의하였으나 일본은 이의 이행을 미루고 지난 11월24일 추모식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관리를 보내어 우리측이 참석을 거부하고 별도의 추도식을 갖은바 있다.


니가타미나마타병


니가타미나마타병은 니가타현(新潟県)에서 1964년 무렵 발병해 1965년 5월 니가타대학 교수의 보고로 처음 확인된 일본 4대 공해병 중 하나이다. 미나마타병과 원인 및 증상이 비슷해 ‘제2의 미나마타병’이라고도 불린다. 원인은 역시 메틸수은이었다. 화학회사인 쇼와전공(昭和電工)이 메틸수은이 함유된 폐수를 인근 강에 방류한 것이다. 주민들은 수은에 오염된 민물고기를 먹고 미나마타병과 똑같은 중추신경 마비, 감각 장애, 난청 등 장애를 겪었다.


이미 미나마타병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일본 정부는 인근에 사는 젊은 여성들을 역학조사해서, 머리카락에 일정량 이상의 수은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했다. 1967년 주민들은 쇼와전공을 상대로 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971년 법원은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 줬고, 쇼와전공은 여성들에 대한 위로금과 배상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증상이 있어도 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한 일부 주민들은 여전히 재판을 이어가고 있다. 2017년 11월 기준 니가타미나마타병의 공식 환자는 705명이다.


참고문헌


1. 그린포스트 코리아

2. 위키백과, 나무위키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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