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애들이 좋아하는 헤이지니가 나오는 KBS키즈 프로그램 《바쁘다 바빠 직업탐험》 을 보고 있었다. 아쿠아리스트부터 시작해서 경찰관, 치과의사, 헤어디자이너, 웹툰 작가 등 각계의 직업을 헤이지니가 체험하면서 어린이들에게 직업을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마지막 멘트로 "OOO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고 묻고, 그 직업 종사자가 어린이들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노력을 대답해준다.
이걸 몇 편을 흥미롭게 보던 아이가 불쑥 자기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고 말한 거다. 뭐든 밥 벌어 먹고 살려면 쉬운 게 없다는 걸 깨달은 걸까.
엄마가 '아무것도(Nothing)' 아니라는 말에 불쑥 화가 치밀었다가, 엄마이자 주부로 살아가고 있는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정말 나는 Nothing 인가, 하면서.
라떼 시절 초등학생 때는 학교에서 매년 가정환경조사서를 적어오게 하면서 마지막에 장래희망을 적는 란이 있었다. 쪼그만 게 아는 직업도 얼마 없으면서 이런저런 멋있어 보이는 장래희망을 적어 내다가 어느 때인가 '엄마' 라고 적어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어릴 때부터 일을 사랑하고 아주 바쁘던 우리 엄마는 아침 일찍 나가서 밤 9시가 다 되어 들어오곤 했다. 나는 하교하고 나면 열쇠로 집 문을 열고 들어가 어두운 집에 혼자 있기도 하고, 친구들과 놀러 나가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우리 집에 친구들을 불러 놀기도 했던 것 같다. 어린 동생은 이웃집에 맡겨져 있었다.
가끔 친구 집에 놀러가면 엄마가 집에 있는 친구가 무척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열쇠로 문을 열지 않아도 엄마가 열어주고, 학교 다녀왔다고 간식도 챙겨주는 친구들 집이 우리집보다 더 따뜻하고 밝은 것만 같았다. 나도 우리 엄마가 저랬으면 좋겠는데 왜였는지 우리집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우리 엄마는 일하지 않고 집에만 있으면 병이 나는 사람이었으니까.
우리 엄마는 저런 엄마가 될 수 없으니 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장래희망을 쓰면서도 그 장래희망란에 '엄마' 라는 단어가 적혀있는 게 그렇게 이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꿋꿋이 집에 있는 엄마를 꿈꾸며 지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내가 꿈꾸던 미래를 살고 있는 거다. 살림하고, 아이들과 남편을 맞이하고, 먹이고 입히고 재우면서 집을 따뜻하고 밝고 편안한 곳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 아이들에겐 엄마가 있는 집이 너무 당연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겠지. 우리 아이들이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어린 나에겐 너무도 누리고 싶었던 워너비의 삶이었다.
공기처럼, 당연하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은 엄마지만, 이 엄마가 사라지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게 될 거야. Nothing 이 금세 Something 으로 바뀌게 된다는 걸 나는 잘 알지.
언제까지고 Nothing 처럼 존재할 수 있는 상황과 마음과 환경이 허락되기를 바라게 된다. 나도 Nothing 같은 내 삶이 꽤 만족스럽다는 걸 깨달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