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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짓수 정글 속 하얀 생쥐

by 제니앤

주짓수의 띠 체계는 '흰 띠 - 파란 띠 - 보라 띠 - 갈색 띠 - 검은 띠' 로 이루어져 있다. 흰 띠를 맨 사람이 가장 초보자이고, 검은 띠를 맨 사람이 가장 상급자다.


나는 흰 띠다.


내가 다니는 체육관 관장님은 흰 띠를 정글 속 생쥐로 비유하시곤 한다. 맹수가 드글거리는 정글 속에서 생쥐는 살아남기만 해도 아주 잘한 것이다. 하지만 정글 속 생쥐로 살아가기란 참 쉽지가 않다. 게다가 주짓수는 띠를 쉽게 바꿔주지 않는데, 흰 띠가 파란 띠가 되려면 2년은 걸리는 듯하다.


흰 띠가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건 어색함이라는 맹수다. 체육관이라는 공간 자체도 낯설고, 주짓수 도복을 입고 있는 내 모습도 너무 어색하다. 생전 처음 해보는 동작들을 배우는 내 모습도 얼마나 우스워보이는지 모른다. 창피하고 부끄럽고 어색하다.


 "하, 그만둘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이 사십이 다 돼 가는데, 주짓수라니. 괜히 나이 탓만 한다.


체육관 탈의실에는 이런 글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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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에 매일 나오는 것만으로도 훌륭합니다.


이 말을 붙잡고 월,화,수,목,금 최대한 자주 체육관에 가면서 어색함이라는 맹수의 발톱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어찌저찌 어색함과 낯설음을 이겨내고 있는 이 생쥐는 스파링에서 진짜 맹수들을 만난다. 주짓수 수업에 가면 먼저 스트레칭을 하고 파트너와 함께 기본기 연습을 한 뒤, 주짓수 기술 수업을 받으며 파트너와 함께 기술 연습을 한다. 주짓수 수업의 마지막은 '스파링'이라고 불리는 겨루기인데, 같이 연습했던 파트너와 주짓수 기술로 5분 동안 겨루면서 실제로 상대를 제압해 본다. 스파링은 실전 연습으로, 배운 걸 써먹어 보는 시간이 매 주짓수 수업마다 있는 셈이다.


순하고 친절하게 가르쳐주던 파란 띠 파트너에게 처음 제압 당해 보았을 때 정말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딱 사자 발에 깔린 생쥐 꼴로, 스파링을 할 때마다 그냥 상대방 아래에 깔려있기 일쑤였다. 배웠던 기술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어쩌다 생각난 걸 써먹으려고 해도 금세 제압 당해 버렸다. 무력감이 올라오고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흥미가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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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장님, 스파링할 때 제가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흰 띠는 정글 속 설치류잖아요. 도망치고 빠져나오고 막을 수 있다면, 또 버틸 수 있다면 그게 잘하는 거예요."


주짓수는 참 이상하다. 잘해야 잘하는 거라고 인정 받던 세상에서 살아왔는데, 분명히 못하는 건데, 이곳에선 오히려 못하는 게 잘하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잘하는 게 중요한 사람이었다. 내가 못하고 있는 걸 견디기가 너무 어려웠다. 치열한 세상 속에서 빨리 맹수가 되지 못하면, 참지 못하고 그만둬 버리곤 했다. 못하더라도, 그런 내가 초라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그냥 그렇게 꾸준히 지속하는 것이 대단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작은 생쥐이지만, 정글 속 맹수들 틈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지닌 생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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