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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라 Sep 08. 2022

나의 바깥에서 찾은 나의 힘

AJS, 골왕&자룡, 고사리박사, 김이랑, 뼈와피와살 작가의 <여자력>

주의: 이 글은 해당 작품의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론

2021년 출간된 <여자력(女自力)>은 여성 만화가 AJS, 골왕&자룡, 고사리박사, 김이랑, 뼈와피와살 작가가 '초능력'이라는 공통 주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낸 단편 만화 모음집입니다. 현재 성행하는 온라인 플랫폼 연재 형태인 웹툰이 아니라 지면의 연출만을 염두에 두고 출간된 흑백 종이 만화라는 점, 그리고 수록된 다섯 이야기가 드라마, 무협, 디스토피아, 청춘, 판타지 등 모두 다른 장르의 만화라는 점에서 현대 한국 만화 시장에 신선함을 가져왔던 프로젝트지요. "여자력(女自力). 이 힘의 규칙은 반드시 자신을 넘어설 것. 그리하여 비로소 '내'가 될 것"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초능력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 살아가며 성장하는 다양한 여성 주인공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자력>의 앞표지

'여자력(女自力)'에 대한 논의가 '女子力(じょしりょく; 전통적 여성성에 걸맞은 매력이나 성 역할을 해내는 능력을 뜻하는 일본의 신조어)'를 어떻게 전복하는가-로 멈추지 않길 바랐습니다. 어원에 집중한 연구도 즐겁지만, 이 글에서는 각 작품 속 여성들이 일구어내는 결실이 어떤 지점에서 자신을 '넘어서는가'를 질문하고자 합니다.

넘어선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스스로의 힘을 뜻하는 자력(自力)을 ‘얻어낼 것’이 아니라, ‘넘어설 것’이 이 힘의 규칙인 이유는 뭘까요?

처음에는 자신을 넘어선다는 것이 자기 능력의 한도를 넘어서는 일, 일종의 진화를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고 나니, 작중 어느 인물도 소위 ‘넥스트 레벨(next level)’로 가지는 않더군요. 애초부터 초능력이 없던 주인공들도 있고요 (“함안군 가야리 땅문서 실종사건”의 모사랑, “바람이 불면”의 송민아, “죽음으로부터”의 루비 등). 여성 초능력자라는 강렬한 소재는 작품들을 잇는 유일한 공통분모처럼 보였지만, 모든 것이 달라 보이는 다섯 이야기에서 찾아낼 수 있는 연속성은 초능력 자체가 아니라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다정함과 연대, 서로를 혹은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의지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때야 제가 ‘여자력’의 소개글을 잘못 이해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을 넘어선다는 것은 개인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으로 가득 찬 좁은 세계에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 다른 사람의 세계에 가까이 가는 것, 그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 자신을 넘어선다는 것이 능력치의 다음 단계만을 의미한다면, 그 성취감으로는 다 덮을 수 없는 공백이 남습니다. 능력 있는 개인이 되더라도 홀로의 세계는 여전히 외롭고, 타인의 세계는 여전히 미지로 남을 테니까요. 그러나 다섯 작품 속 인물들은 위험부담을 안고서라도 기어이 자신만의 세계 바깥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바깥에서 자신을 지탱할 힘을 찾아냅니다. 자신의 바깥, 곧 자신이 결코 동화될 수 없지만 여전히 곁에 남고 함께 하길 원하는 타인과 만나면서요. 스스로 일어나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 가히 초능력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눈부신 자력(自力)은 실은 스스로의 바깥, 즉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여자력>의 다섯 작품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통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

이 글에서 상호주체성 이론에 기대어 <여자력>을 분석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상호주체성 이론은 주체가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성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타인을 자아 형성을 위한 도구로 함부로 축소하거나 이질적인 존재로 배척하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관계의 가능성을 연구합니다. 정신분석학에 페미니즘과 상호주체성의 개념을 도입하려 한 제시카 벤자민(Jessica Benjamin)에 의하면, 주체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선 반드시 타인이 필요합니다. 주체가 자신을 자신이 하는 행위의 주인이라 인식하기 위해선, 그의 행위, 감정, 의도, 존재, 독립됨을 인식하고 인정해줄 (recognize) 타인이 불가결하다는 것입니다. 주체가 “나는 존재한다, 나는 행동한다”라고 선언할 때, “너는 존재한다, 네가 그렇게 행동했구나”라고 대답해줄 타인이 필요한 것이죠. 우리는 타인의 대답 속에서 우리를 찾습니다(Benjamin, 21쪽). 내가 생각하는 나, 진정한 나의 개념은 타인으로부터 독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가 독립된 주체임을 진정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타인이 있어야만 찾을 수 있는 개념입니다 (33쪽).


서로를 주체로 인식하는 상호 인식 (mutual recognition)은 벤자민의 상호주체성 이론의 핵심입니다. 주체가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고 자신을 찾으려면, 자신이 만나는 타인 역시 주체임을 알고 그와 함께 있으면서 그와 소통해야 합니다.

상호주체적 관점은 개인이 다른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관계를 통해 성장함을 주장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가 만나는 타인 역시 주체임을, 의당 자신에의 권리를 가진 주체임을 아는 것이다. 상호주체적 관점은 타인을 나와 다르면서도 닮은 존재로, 비슷한 심리적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타인으로 인식할 수 있고 또 인식해야 함을 전제로 한다.
The intersubjective view maintains that the individual grows in and through the relationship to other subjects. Most important, this perspective observes that the other whom the self meets is also a self, a subject in his or her own right. It assumes that we are able and need to recognize that other subject as different and yet alike, as an other who is capable of sharing similar mental experience. (20쪽; 자체 번역)


세상에 내가 진정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 내가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이 눈부신 순간이 전제하는 자신만의 힘(자력)은 역설적이게도 타인의 존재와 관계 맺지 않고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자력>의 주인공들이 자신을 인지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는 자생적으로 생겨난 초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지금부터는 다섯 단편 속 주인공들이 어떻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지, 어떻게 자신 바깥에서 자신을 위한 힘을 찾아내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자신을 넘어서야만, 즉 자신의 좁은 세계 바깥으로 발을 내딛어야만 찾을 수 있는 진정한 ‘나’의 감각은 어떻게 만화로 재현되고 있는지, 각 작품 속 상호주체성의 순간이 드러나는 특정 장면들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AJS 작가의 "함안군 가야리 땅문서 실종사건"

부모를 잃고 다섯 살에 얼굴도 몰랐던 증조할머니에게 맡겨진 모사랑. 할머니는 사랑을 “퍽 잘 돌보았지만, 당시의 [사랑은] 그 어색함을 기민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AJS, 37쪽).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맡겨진 아이인 자신을 할머니가 “정말은 귀찮아했을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지요 (38쪽). 어느 장날, 사랑은 할머니와 시장을 구경하다 길을 잃고 맙니다. 그런데 평소 울보였던 사랑은 미아가 된 그 순간만큼은 어쩐지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소리 내 울어도 소용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길을 잃어도 울 필요가 없겠구나” (39쪽).


아이에게 울음은 울음에 응답할 타인 즉 보호자가 존재할 때에야 의미 있습니다. 소리를 내서 보호자에게 내가 여기 있음을, 내가 보호와 사랑, 음식과 돌봄을 필요로 함을 알려야 하죠. 하지만 사랑은 자신을 발견해줄 타인의 부재로 인해 자신이 존재하고 있고 외로우며 두렵다는 것을 소리로써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타인의 눈이 자신을 보지 않는 순간, 즉 자신의 존재가 인식되지 못하는 순간, 자신은 자기 자신에게서도 사라져 버립니다. 벤자민은 타인이 자신을 인식하고 내가 타인을 인식하는 상호인식(mutual recognition)과 함께 있음을 향한 열망은 갓난아기와 엄마 사이의 관계에서부터 관찰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기는 자신이 몸을 움직일 때 이에 반응하는 보호자를 봄으로써 자신이 세상에게, 즉 자기 바깥의 존재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보호자가 자신의 바디 랭귀지를 읽어내지 못하면 치명적인 상실감을 느끼죠. 자신의 영향력, 세상에 대한 통제력이 붕괴되는 순간입니다 (Benjamin, 27쪽). 이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길을 잃었으나 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랑이는 자신이 슬프다는 감각은커녕 자신이 아닌 존재에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주체로서의 감각 역시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런데 울지도 못하고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던 사랑의 완벽한 홀로 됨을 허물어 버리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나이 때문에 “결코 뛰는 법이 없”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증조할머니가 온몸을 땀으로 적셔 가며 사랑을 찾아 뛰어 온 것입니다 (AJS, 40쪽). “사랑아!”라고 외치는 순간, 할머니가 사랑이를 인식하는 순간, 그제야 사랑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집니다 (41쪽). 할머니는 사랑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때야 비로소 사랑 역시 자신이 자신임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자신만이 존재하던 공허에서 나와 할머니의 품이라는 현실로 돌아오고, 무도하게 크고 황망했던 “밤하늘의 어둠”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41쪽).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밤하늘의 어둠은, 할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자신됨을 찾은 사랑이가 자신, 타인,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세계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자신을 찾게 되었다는 감각, 잃어버렸던 것이 회복되는 감각은 사랑이 세계를 똑바로 인식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죠. 사랑이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선, 먼저 사랑을 사랑하는 이에게 발견'되어야' 합니다. 상호주체적 관계 속에서야 비로소 아이는 자신을, 자신의 힘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골왕 작가, 자룡 작가의 "야사"

"야사"는 다른 네 작품과 약간 결이 다른 작품입니다. 다른 작품들이 두 명 이상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사랑과 연대의 순간을 그린다면, "야사"는 따뜻한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어떻게든 자신을 발견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무위는 사막을 건너왔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산 사람들은 노예로 팔았다고 말합니다 (골왕-자룡, 61쪽). 그런데 사람들은 어린 여자아이가 학살을 피하고 사막을 건너왔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다: “애 혼자서 사막을 어떻게 건너?” … “애가 아이답지도 않고 아무래도 이상해” (62쪽). 아무도 무위의 이야기를 믿지 않고, 이에 무위 스스로도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기에 이릅니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부정되는 순간, 무위는 극도의 고독함을 느끼게 됩니다. 무의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그가 겪은 트라우마와 분리될 수 없는데, 그가 겪은 학살을 모두가 부인하기 때문에 무위의 존재 역시 약간은 부인되고 맙니다.  


무위의 초능력은 상대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꿰뚫어 보는 능력입니다. 달리 말하면, 누군가와 소통하고 대화할 때에야 의미 있는 능력입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말에만 효력을 발휘하지요. 무위는 타인의 말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지만, 모두가 부인하는 자신의 기억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 "이건... 기억이냐, 환상이냐? 대답해봐!" (79쪽). 무위의 초능력은 유용하지만 자신의 기억과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 있어선 소용이 없습니다. 무위는 초능력은 있지만 자력은 어딘가 부족한 캐릭터입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스스로 믿지 못하는 그가 자력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타인이 필요합니다. 다만 그 타인은 무위가 하는 말을 진실로 믿어주는 사람이거나, 같은 마을에서 학살을 피해 생존한 사람이거나 혹은, 그 학살의 주범이어야 합니다. "모두가 일어나지 않은 일인 줄로 알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무위에게 학살범은 "기억하다니! 그런 일 따위 없었어!"라고 외칩니다 (104-105쪽). 그가 이실직고를 하는 게 아니라 거짓말을 했기에 무위는 초능력을 통해 그 말의 진위를 스스로 가려낼 수 있었고, 자신이 겪었던 일이 모두 사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106쪽).


"야사"는 타인을 '내가 아닌 것,' '내가 멀리하고 싶은 다름'으로 축소하지 않으려는 상호주체적 윤리와는 동떨어져 있는 작품입니다. 서로의 세상을 서로에게 열어주고자 하는 사랑을 이 작품에선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무위와 동행하는 인물인 아정조차 무위가 자신을 찾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요. 다만 "야사"가 보여주는 것은, 그럼에도 개인이 진정 자신을 '자신답다' 느끼는 것은 여전히 혼자만의 공간에선 불가능하다는 것일 겁니다. 주체성은 지극히 사적이고 독립된 개인 안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Crossley, 24쪽)*. 언제나 그의 바깥에서 일어난 일들과 타인과의 관계가 그를 구성합니다. 때문에, 자신이 겪은 바를 긍정해주고 인식할 수 있는 이들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무위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진정 자신답게 살 수 없었죠. 그렇다고 만약 무위가 가족과 마을을 죽인 원수를 찾지 못한 채 자신의 트라우마를 그저 회피하고 말았다면, 그 경험의 진위와는 별개로 자기기만의 괴로움을 경험했을 겁니다. 자신을 찾기 위해 무위는 혼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을 알아야 하고, 공포와 불확신으로 얼룩진 바깥 세계로 향해야 하며, 아무도 긍정하지 않는 기억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경계를 넘어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무위는 그렇게 하지요. "야사"가 보여주는 용기는 복수의 의지라기보다는, 스스로의 상처를 직면하고 알고자 하는 의지이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의 좁은 세계 바깥으로 성큼 내딛는 무위의 결연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사리박사 작가의 "조용한 세상의 미소"

쓰레기가 가득한 5평짜리 원룸에 틀어 박혀 있는 조미소. 미소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아예 차단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다못해 ‘나는 엽기떡볶이를 시킨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해도 그 말에 긍정할 사람이 없습니다. 배달부가 갑작스러운 초능력 발현으로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거든요 (고사리박사, 120쪽).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초능력이 생기고, 일주일 후 문명은 끝을 마주합니다. 한동안 칩거 중이었던 덕에 목숨을 건진 미소는, 강력한 초능력을 무기 삼아 폭력을 일삼는 '마스크 패거리'를 피해 숨어 다니며 생활합니다. 그러다 마스크 패거리에게 유괴당해 자루에 갇힌 여자아이 승아를 발견하고, 아이를 구출해 함께 도망 다니기 시작합니다.


멸망한 세상 속에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든 와중에 공격은 고사하고 방어력도 없는 초라한 초능력을 가지고 거리를 전전해야 하는 미소지만, 그는 승아를 지나치지 못합니다. 자루를 여는 순간 미소는 승아를 발견'했을'뿐만 아니라, 승아에게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작품은 자루에 가둬진 승아의 눈에 담겼을 어둠을 홀로 남겨진 미소가 바라봤던 어두운 단칸방과 병치하며, 미소가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느꼈던 외로움과 공포가 그가 승아를 외면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누가 꺼내 주기만… 언젠가 나갈 수 있게 되기만을 … 그래도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아서 포기하려고 했을 텐데 근데 마침 제가 걔를 발견해 버렸잖아요” (148-49쪽). 단칸방에 있던 미소는 살아 있고, 존재하며, 외로움과 자기혐오를 느끼고 있었지만, 미소의 생과 감정을 긍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알기에 승아의 공포와 외로움을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었죠. 미소는 자신이 승아를 발견해 버렸다고 하지만, 동시에 미소 역시 승아에게 발견되었습니다. 미소는 드디어 자신의 존재를 긍정해 주고 필요로 하며 의지해 줄 누군가를 만난 것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래 서구 정신분석이론은 주체가 타자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타자를 이용해 자신을 구성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상호주체성 연구자들은 주체에게 타자를 점유하고자 하는 욕망 외에 다른 마음 역시 있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고전적 이론의 시선으로 본다면 미소가 승아를 지나치지 못한 것은 '나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자신감을 원하는 미소의 욕망을 위해 필요한 대상, 즉 나의 자기 효능감을 인정해줄 수 있을 만큼 약하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무언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호주체성 이론은 주체가 그저 타인과 함께 있고, 함께 느끼면서 같음(sameness)을 경험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합니다:

'함께 있는 것'은 힘 있는 자와 없는 자, 주동과 수동의 대립을 허문다. 그것은 나보다 약하거나 나와 다른 것들, 타자를 대상화하고 부정하는 경향에 대항한다. 그것은 동정심 (compassion), 밀란 쿤데라가 말한 ‘함께-느낌(co-feeling)’의 토대가 된다. 통제의 강요 없이 감정과 목적을 나누고 차이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같음(sameness)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Being with” breaks down the oppositions between powerful and helpless, active and passive; it counteracts the tendency to objectify and deny recognition to those weaker or different – to the other. It forms the basis of compassion, what Milan Kundera calls ‘co-feeling,’ the ability to share feelings and intentions without demanding control, to experience sameness without obliterating difference. (Benjamin, 48쪽; 자체 번역)


미소는 승아에게 완벽하고 강인한 보호자가 되어 주지 못합니다. 미소는 너무 약하고, 아이를 동행하는 것은 발걸음마다 곤경과 위험요소를 끌어들입니다. 미소는 '누군가를 보호할 만한 힘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다. 혼자 방에 처박혀 있어도 상관없던 그때로. 그땐 내 생각만 해도 괜찮았는데. 다른 사람 걱정 같은 건 할 필요도 없었고”라고 생각하는 미소도 결국 혼자였던 그때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고사리박사, 138쪽). 어느 순간부터 미소는 보호자로서 승아를 지탱하는 동시에, 승아로부터 살아갈 이유를 공급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존재조차 알리지 못한 채 혼자만의 공간에 고립되어 있던 미소가 계속해서 숨 쉴 수 있게 된 것은,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과 함께 있길 바라는 승아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소는 자기보다 약하고 어린 승아를 이용해 자신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효능감을 얻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승아를 '과거의 자신'으로 환원해서 보고 있는 것도 아니죠. 다만 미소는 승아를 지켜주고 싶다고 느끼고, 누군가를 돌보고 싶다는 마음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살아갈 이유"가 됩니다 (154쪽). 미소가 자신을 긍정하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단칸방을 박차고 나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난 타인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능력도 없고 자신도 없으면서 감히 타인의 세계에 문을 두드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미소는, 자신만의 세계 바깥에서 오롯이 자신으로서 살아갈 힘을 찾게 됩니다.


김이랑 작가의 "바람이 불면"

몸에서 바람이 나오는 초능력자로 태어난 이선형은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힘을 제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결국 학교를 한 달 넘게 빠지고 맙니다. 왜인지 모르게 선형에게 미움받고 있다고 느끼던 같은 반 친구 송민아는 선형이 학교에 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자 선형의 집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알게 되고, "그래도... 계속 이렇게 집에만 있을 수는 없잖아"라며 선형을 돕기 시작합니다 (김이랑, 206쪽). 선형은 집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면 긴장이 되는 나머지 바람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민아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함께 나가면 "조금이라도 안정 효과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208쪽). 실제로 이불 쓰고 나가기 작전은 효과가 있었고, 선형은 민아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집 밖의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매일 조금씩 걸을 수 있는 거리를 늘려갔다” (209쪽). 그렇게 충분히 친한 사이가 된 후에야 민아는 선형에게 왜 자신을 미워했는지 묻고, 예상치 못한 답을 듣게 되며 좋은 관계, 상처 주지 않고 타인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재고해보기 시작하지요.


선형은 말을 안 합니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왜 네가 불편한지. 그러나 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선형에게 지겹게 달라붙습니다. "대놓고 싫은 티를 내니까 오히려 더 오기가 생겼"다는 민아는 오해라면 어떤 오해가 생겼는지, 다툼이 났다면 왜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는지를 자꾸만 알아내려 합니다(197쪽). 이런 의지는 사람을 피곤하게도 하지만, 타인과의 윤리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능력입니다. 그런 면에서 민아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민아가 선형에게 주는 애정과 관심은 상호주체적 관계 속에서 주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멋진 초능력입니다. 지치지 않고 선형에게 다가가는 민아를 보며 김이랑 작가는 민아야말로 초능력자라 느낍니다 (김이랑, 251쪽). 물론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남을 상처 입히기도 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겠지만,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법"을 점차 배워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초능력을 얻어가는 과정일 것이라 말합니다: "그렇게 체득된 감각은, 보통의 건강한 어른이 되면서 갖게 되는 초능력이고 실수와 경험은 그렇게 되기까지의 수련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251쪽). 김이랑 작가의 후기는 타인과의 관계가 수반하는 '나'와 '너' 사이의 간극을 존중하면서도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힘을 직접적으로 초능력이라 정의하고 있어, 전체 단편집의 공통 메시지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상호주체성 이론의 역사 속에서 타인과의 물리적, 언어적 공존에 대한 고찰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프랑스의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에 의하면, 상대를 온전한 주체로 인식하는 것은 "'다름'을 축소하거나 다름에 의해 축소되지 않으면서 다름에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것이자 다름과 관계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Crossley, 27쪽).** 민아는 초능력자들을 비하하고 그들을 일반화하는 대화에 불편함을 느끼고, 선형의 초능력을 이유로 그를 '선형'이 아닌 '초능력자'로 바라보지 않길 원합니다. 민아에게 자신과 선형의 '다름'은 선형을 알아가고 그를 응원하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되지 않지요. 민아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세계와는 너무나 다른 선형의 세계에 다가가고, 자신의 세계 역시 열어젖혀 선형이 발 디딜 곳을 넓혀 줍니다. 


그런 민아와의 관계 덕분에 선형은 스스로 걸을 수 있는 힘을 찾게 됩니다. 선형에게는 모든 장소가 불편하고 외롭고, 잘못하면 망가질 수 있는 연약하고도 불안정한 곳이었으나, 민아와 함께 천천히 그가 속한 공간 속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존재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웹툰의 서사 공간>의 저자 양혜림은 이러한 과정을 주인공이 타인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소외 공간'에서 '애착 공간'으로 전환하는 플롯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웹툰 속 주인공들이 서로를 만남으로써 그들이 거주하는 시공간에 새로운 의미부여를 하기 시작하는 과정에 주목합니다:

이질적인 존재였던 상대는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주인공에게 삶의 여정을 함께 할 동반자로 자리 잡는데, 이는 주인공의 애착 공간으로 자리 잡은 ‘너와 함께 있는 곳’이 주인공의 세계 전체로 확대됨을 의미한다. 주인공은 상대와의 만남을 통해 소외와 결핍을 해소하고 성장을 달성하는 것이다. (양혜림, 80쪽)

진정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느낌.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무너집니다. 만화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지요. 인물들이 스스로 일어나고 내일을 마주하기 위해선, 강한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함께 세계를 거닐 타인이 필요합니다. 선형에게 민아와의 시간, 즉 "상대와 함께 있는 시간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휴식과 회복의 시간으로 기능"하며 (79쪽), 이 상호주체성의 시간은 외로웠던 세상을 애정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선형은 그야말로 자신을 넘어서 비로소 자력을 얻어내는 캐릭터입니다.


뼈와피와살 작가의 "죽음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의 두 주인공 루비와 다야는 "딱히 공통점이라곤 없는 사이"입니다 (뼈와피와살, 256쪽). 그도 그럴 것이 루비는 "남들과 같이 이치를 따르는 자"이고, 다야는 "남들과 달리 이치를 거스르는 자"이니까요 (254쪽). 둘은 섞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작품은 바로 그렇기에 두 사람이 함께 있어야만 가능한 순간이 얼마나 신비로운지에 주목합니다. 모든 것이 다른 두 주체가 놀랍게도 어떤 감정들은 분명 함께 느끼고, 어떤 일들은 반드시 함께여야만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세상을 소중하게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 속 인물들이 그렇듯, 루비와 다야가 '너'와 '나,' '주체'와 '대상'의 경계를 초월해 '우리'가 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상호주체성 이론은 언뜻 단순해 보입니다. 내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자아는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말은 진심인지, 그 한 길 속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주 보고 대화하더라도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고, 내가 느끼는 감정을 타인도 느끼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기도 어렵지요. 오랜 세월이 지나 노년의 나이에 재회한 루비와 다야 역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기보단, 과거의 기억과 각자의 불안에 기대 상대가 '이러이러하지 않을까' 추측할 뿐입니다. 특히 걱정이 많은 루비가 그렇지요. 늘 초능력 때문에 마녀라고 놀림받고 배척받았던 다야를 결정적인 순간에 도와주지 못했던 일에 죄책감을 느껴온 루비는, 다야가 정말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새도 없이 끊임없이 걱정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한데. 날 골탕 먹이려는 속셈 아니야? 어디 이상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고생시킬 작정인가? 그래. 내가 그때 도와주지 않았다고 앙갚음하려는 걸지도 몰라" (268쪽).


나와 타인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 반드시 이상적인 관계의 상태는 아닙니다. 모든 주체는 (루비처럼) 자신만의 사색에 빠지거나 타인이 '이러이러할 것이다'라고 상상하곤 하니까요. 한편으로 상상력은 우리가 결코 동화될 수 없는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짐작하게 하는 능력이지요. 우리는 상상을 통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고, 표면적인 대화를 통해서는 미처 보지 못한 상대의 진심을 눈치껏 확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상상력은 우리가 상대의 진정한 의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색안경이 될 때도 많습니다. 타인이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느라 때때로 타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도 하지요. 이 두 상태 사이에서 우리는 진자 운동을 하듯 왔다 갔다 하며 타인을 알아갑니다. 아주 사적인 사색의 공간으로 들어갔다가 다시금 타인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모든 즉각적 상호작용은 사색이라는 방해물 앞에서 무의미해지기도 하지만, 그러다가도 자신과 타인을 나누는 상상 속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진실되고 즉각적인 소통이다시금 그 방해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All spontaneous interactions can be stultified by a reflective block, only to be undermined later by a genuine and spontaneous communication which collapses the reflective barriers of self and other (Crossley, 71쪽)

"죽음으로부터"의 루비와 다야 역시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각자 혼자 상상하고 짐작합니다. 상상을 통해 상대의 입장에 이입하여 그가 어떻게 느꼈을지를 예측하기도 하지만, 때로 오해를 만들기도 합니다. 상대가 내가 생각했던 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은 으레 충격적이기 마련이지요. 루비와 다야는 각자의 상상을 통해 서로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함께 소통함으로써 알 수 없던 서로를 부분 부분 알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판타지스러운 활약이 아니라 아주 일상적인 행위, 대화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를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주체와 주체의 함께 함'으로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대화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서로를 알고 스스로를 알게 되죠. 


대화는 이보다 더한 것도 가능하게 합니다.  메를로퐁티는 그의 <지각의 현상학  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에서 언어적 소통을 통해 두 명의 화자가 각각의 세상을 합한 것보다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와 타인은 서로의 생각 속으로 스며들며 누가 먼저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는 공존의 장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대화의 경험에서 언어는 타인과 나 사이에 공통 지반을 구성하고, 나의 사고와 그의 사고는 하나의 직물만을 만들며, 나의 말과 대화자의 말은 논의 상태에 의해 불려 나오고, 이것들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의 창조자가 아닌 공통 작용에로 끌려간다. 바로 여기에 그 둘에 속하는 존재가 있고, 타인은 더 이상 여기서 나에 대하여 나의 선험적 장 속의 단순한 행동도 아니며, 나 또한 그의 선험적 장 속의 내가 아니다. 우리는 완전한 상호성의 협력자이고, 우리의 조망들은 서로에게 스며들며, 우리는 동일한 세계를 통하여 공존한다 (메를로퐁티, 530쪽)


루비와 다야의 세계는 어떨까요? 루비는 곤경에 처한 이들을 지나치지 않는 선한 마음을 가졌고, 다야는 이타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무거운 돌을 염력으로 들어 올리거나 천리안으로 먼 곳을 볼 수 있는 등 다양한 초능력을 가졌습니다. 둘 중 하나만 있거나 둘이 전혀 소통하지 못했던 때에는 그들이 도울 수 있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일도 한정되어 있었죠. "난 도와주기 싫은데?"라고 말하는 다야를 혼내서라도 남을 돕는 루비를 보며 (뼈와피와살, 281쪽) 무언가 느낀 다야는 말합니다: "너 없이 나 혼자 허수어미를 만났다면 분명 그냥 지나쳤을 테고 나 없이 너 혼자 허수어미를 만났다면 분명 도와주지 못하고 떠났을 거야. '우리'라서 볼 수 있는 세상이 있어. 그건 분명 신나는 일이야" (284쪽). 다야가 말하는 "'우리'라서 볼 수 있는 세상"은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세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한때 서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두 주인공은 어느새 서로를 동반자로 인식하고, 함께 그들만의 세상을 꾸리게 됩니다. 루비와 다야는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기에 그들의 대화 역시 언제나 예상을 빗나가게 되어 있지만, 그래서 그들이 함께 열어젖히는 상호 세계 역시 그들이 예측하지 못한 모습으로, 하지만 분명 훨씬 신나는 모습으로 펼쳐집니다.


결론

<여자력> 뒷 표지. 이 글에서는 '자신을 넘어설 것'을 자신만의 좁은 세계에서 나와 타인과 세상과 관계 맺는 것,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을 찾는 것으로 이해한다.

지금까지 <여자력>의 다섯 단편 속에서 주인공들이 타인과 관계 맺음으로써 얻게 되는 자기 확신, 사랑, 내일을 맞이할 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여자력>의 모든 주인공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바깥 즉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찾고 자신을 지탱할 힘을 얻습니다. 초능력이 있든 없든 마찬가지지요. "야사"의 무위처럼 자신의 기억을 확증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기도 하고, "함안군 가야리 땅문서 실종사건"의 사랑이나 "조용한 세상의 미소"의 승아처럼 자신을 발견해줄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또 승아를 발견하는 미소나 "바람이 불면"에서 선형을 발견하는 민아처럼, 누군가를 찾아내고 그를 지켜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됨으로써 살아갈 이유를 얻기도 합니다. 그리고 "죽음으로부터"의 다야와 루비처럼,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넘어가기 위해 오해와 지레짐작을 내려두고 대화를 시도하고, 불편함이 수반되더라도 함께 있음을 자처하지요.


초능력이라는 권능은 으레 독자들로 하여금 만화 속 대안 세계를 동경하게 만듭니다. '내게 저런 능력이 있었다면...'이라고 생각하며 현실의 무력함을 자조하게 만들기도 하죠. 하지만 <여자력>이 건네는 초능력은 지금 독자들이 발붙이고 서 있는 이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발견하고, 발견될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질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초능력입니다. 김이랑 작가의 후기에서처럼, 우리는 서로를 상처 입히지 않으면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주체로 보는 능력, 우리 안에 이미 숨겨져 있는 공감과 연대의 초능력을 얻기 위해 수련하고 있으니까요 (김이랑, 251쪽). 나와 타인 사이에는 언제나 괴리가 존재합니다. 때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심연이 그 사이에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심연을 날아 상대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날아오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화라는 날개를 열심히 퍼덕거리면서요.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는 모두 평범한 초능력자인 것이지요. 


'스스로 일어설 힘'을 얻어내는 모든 서사는 1인극일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아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구성하고, 찾고, 이해하니까요. 그래서 이 책이 독자들에게 건네는 마음은, '혼자서도 잘 살아남아라'가 아니라, '함께 살아내자'입니다. 페미니스트 콘텐츠로서 <여자력>이 우리에게 전하는 마음은 '능력 있는 여성이 되어라'가 아니라, '여자들아, 서로를 보완하고 사랑하자. 그리고 무엇보다 같이 있자'입니다. ''''는 절대 섞일 수 없지만, 바로 그렇기에 함께 있음은 우리에게 어떤 충만함을 안겨줍니다. 자아는 스스로 일어설 힘을 자급자족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힘을 받고, 타인 역시 나에게서 힘을 얻습니다. 제시카 벤자민은 이 상호작용을 밥을 먹여주는 행위에 빗대어 표현한 바 있습니다:

자신과 타인이 절대 섞일 수는 없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섞임의 경험이 만드는 엄청난 감정적 효과를 가능하게 한다. 타인이 나의 바깥에 있다는 것은 내가 진정으로 ‘먹여지고 있다(fed)’는 느낌, 스스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바깥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 느낌이 들게 한다.
The fact that self and other are not merged is precisely what makes experiences of merging have such high emotional impact. The externality of the other makes one feel one is truly being ‘fed,’ getting nourishment from the outside, rather than supplying everything for oneself (Benjamin, 47쪽; 자체 번역)

어쩌면 <여자력>을 읽으며 우리는 이 '먹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얻을 수도 있겠습니다. 혼자여선 안 된다는 마음, 발견되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함께 할 누군가가 저 너머에 있다는 확신. 그런 것들이 <여자력>의 여섯 작가들이 독자들에게 정성껏 차려준 식탁이지요. 여성 서사에 목마른 독자들은 이 식탁의 충만함을 기뻐합니다. 함께 살아갈 여자들을 찾고 그 배부름을 나눕니다. 나의 바깥에서 찾은 나의 힘. 그 힘을 고 오늘도 누군가와 함께 살아남습니다. 서로에게 힘을 먹여 주면서.


*"...human subjectivity is not, in essence, a private ‘inner world’ which is divorced from the outer (material) world; that it consists in the worldly praxes of sensuous, embodied beings and that it is therefore public and intersubjective" (Crossley, 24; 자체 번역).

**"Perception is an opening out onto and engagement with otherness, which neither reduces it not is reduced to it" (Crossley, 27; 자체 번역). 크로슬리(Crossley)는 상호주체성 연구의 연구 동향을 설명하며, 프랑스의 현상학자이자 실존주의 철학자 메를로퐁티가 정의하는 인식, 관찰의 개념이란 상대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그 다름과 함께 하길 청하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메를로퐁티에게 지각은 대상을 경험하는 일이 아니라, 대상과 함께 있을 것을 스스로에게 명령하는 것, 대상과의 관계 속에 있는 것, '다름'과 교감하는 것을 의미한다 (28).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3148615

참고문헌

메를로퐁티, 모리.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번역, 문학과 지성사, 2002.

양혜림. <웹툰의 서사 공간>. 만화웹툰이론총서, 커뮤니케이션북스, 2019.

AJS, 골왕&자룡, 고사리박사, 김이랑, 뼈와피와살. <여자력>. 문학동네, 2021.

Benjamin, Jessica. <Bonds of Love: Psychoanalysis, Feminism, and the Problem of Domination>. Pantheon, 1988.

Crossley, Nick. <Intersubjectivity: The Fabric of Social Becoming>. Sage, 1996.


- 작품에 대해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AJS 작가님, 골왕 작가님, 자룡 작가님, 고사리박사 작가님, 김이랑 작가님, 뼈와피와살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 <여자력>은 현재 각종 서점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상단 링크는 알라딘 링크입니다.

- 국내 번역본이 없는 <Bonds of Love>와 <Intersubjectivity>의 모든 인용문은 글쓴이가 스스로 번역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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