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라 Oct 13. 2022

믿고 싶은 여자들

고사리박사 작가의 <극락왕생>

주의: 이 글은 해당 작품의 줄거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는 살 수 없잖아요.
주변에 있는 모든 걸 불신하고
의심하고 탓하면서
사람이 그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사람이 그렇게 살면은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전 앞으로도 그냥
다 믿고 살 거예요.
안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해요?
아침은, 아침이...
아침이 계속 오는데...
<극락왕생> 제9화; 33화


페미니즘과 영성

어떤 이들은 페미니즘과 종교는 화해할 수 있다 하고, 어떤 이들은 양립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어떤 이들은 맥락에 따라 다르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페미니즘이 그 자체로 하나의 영성(spirituality)이라고 합니다 (Deo, 1쪽). 페미니즘이 여전히 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특히 서구 페미니즘은 성차별적인 기독교 이데올로기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이기도 했으니, 페미니즘만큼 종교와 멀리 떨어져 보이는 것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죠. 굳이 페미니즘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미 종교와 영성을 말하기엔 너무나 세속화된 곳 같아 보이고요. 물질주의와 자본주의가 초자연적인 신의 이야기보다 훨씬 가깝고 진실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렇게나 세속화된 세계인데 왜 여전히 종교는 사라지지 않는 걸까요? 왜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이 그 자체로 영성에 대한 담론이라고 말하는 걸까요?


사실 종교와 영성은 좀 다른 개념입니다. 종교가 교리, 의례, 공동체가 모이는 장소 등을 통해 제도화된 하나의 문화 체계라면, 영성은 그보다는 개인 안에 있는 내적인 에너지이기에 종교 밖에서도 존재가 가능하지요:

영성은 인간의 내적인 자원의 총체로서,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 타인 및 상위 존재와의 의미 있는 관계를 유지시키며 신체, 영혼, 마음을 통합하는 에너지, 존재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주관하게 하고, 당면한 현실을 초월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 등을 의미한다. ... 다시 말해 현재의 자기 자신과 환경 너머를 보고 현실을 뛰어넘는 의미와 가치를 찾는 능력을 말한다. ("영성." <상담학 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그렇기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등 수많은 종교들이 여성을 타자화하고 열등한 존재로 가르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여성들은 신에 대한 사랑, 신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믿음 안에 가부장적인 종교를 초월하는 영성을 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영적 체험에 대한 기록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방법도 없다는 이유로  비이성적이고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에 이르러서는 페미니즘 논의가 여성의 영적 체험과 초월을 향한 믿음을 배제해왔다는 문제제기가 시작되었습니다(postsecularism). 과학, 물질주의, 세속주의가 설명하는 세계관만이 진실이라면, 어떤 여성들의 영적 체험은 충분히 '진실'하다고 여겨지지 못할 것이고, 그것은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을 위한 싸움이 되지 못하게 는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지요. '당연히 말이 안 되지'라고 여겨졌던 모든 것에 '정말 그럴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페미니스트 정신이라면, 여성의 초월적 경험이 '말이 안 된다'라고 말하는 사회에도 '과연 그럴까?'라고 물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페미니스트 영성을 가르치는 알카 아로라(Alka Arora)는 여성들에게 필요한 건 종교가 사라진 세계가 아니라, 더 나은 종교가 존재하는 세계라고 말합니다 (Arora, 35쪽). 가부장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종교가 문제인 것이지, 종교적인 삶이나 영성, 초월에 대한 욕구가 그 자체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37쪽). 그는 엘리트 남성들이 종교적 전통을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만들었다면, 역으로 페미니스트 여성들 역시 그러한 전통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여 페미니스트의 대의를 향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39쪽).* 영성은 분명 가부장제 전통을 초월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부장제를 걷어낸 <극락왕생>의 여성 신들

<극락왕생>의 카카오웹툰 썸네일.

이러한 논의에 비춰봤을 때, 고사리박사 작가의 <극락왕생>은 불교의 여성혐오적 측면을 걷어내고 관음을 비롯한 모든 초월적 보살들(문수, 보현, 지장 등)과 모든 주요 인물들(박자언, 도명존자, 도명반 일동 등)을 여성으로 재현함으로써 불교의 주요한 가르침들을 여성의 경험에 적합하게 수정하는 도전적인 작품입니다. <극락왕생>이 디자인하는 것은 평등과 자비를 말하고 더 나아가 여성들 간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영성이죠.


사실 불교는 90년대부터 서구 페미니스트 신학자들과 여신학자들에게 남성중심주의를 타파할 종교로 각광을 받아왔습니다. 페미니스트 불교 신학자로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을 저술한 리타 그로스(Rita M. Gross)는 불교의 가장 원형적인 가르침과 상징들이 그 자체로 평등주의적이고 해방적이므로 페미니스트 종교로 얼마든지 재해석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으며 (Gross, 127쪽), 여러 보살들 중에서도 특히 관음은 페미니스트 불교를 대표할 상징적인 여신으로 환영을 받았죠 (김신명숙, 299쪽).


그러나 서구에서 관음을 페미니스트 여신으로 이해하는 데 반해 한국은 유교의 영향으로 "관음을 여성으로 인식하는 것에 회의적"이거나 여성으로 이해하더라도 "유독 모성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298쪽). 이에 한국 여신연구가 김신명숙은 성평등이 보편가치로 수용되어야 하는 현시대에 맞는 새로운 관음상이 필요하고 주장하죠:

동아시아 관음신앙의 이러한 현실은 성평등이 보편가치로 수용된 현대에 문제적이다. 때문에 시대에 맞는 새로운 관음상을 정립할 필요가 절실하다. 그런데 이 시대적 요구는 특히 관음의 경우 어렵지 않게 충족될 수 있다. 관음은 시대와 장소, 문화까지 구애받지 않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해 얼마든지 새로운 모습과 성격으로 응신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시대의 새로운 가치인 페미니즘과 관음은 얼마든지 새롭게 만날 수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할 것이 바로 서구에서 등장한 여신관음이다. (299쪽)
<극락왕생> 제1화의 관음보살과 제4화의 문수보살

모성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우나 여전히 여성의 보호자인 <극락왕생>의 관음은 서구 페미니스트 불교 연구자들이 받아들인 여신으로서의 관음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극락왕생>의 배경은 2011년 한국의 부산이죠. 보살의 능력에 직통으로 닿는 존재들 역시 사투리를 쓰고, 특별할 것 없는 매일을 견뎌내고, 지하철을 타고, 교복을 입거나 편의점 알바를 하며 살아가는 부산 여자들입니다. 이 작품 속에서 불교의 여신들은 한국 여자들을 위한 존재인 것이죠. 또한 김신명숙은 새로운 페미니스트 여신으로 관음만을 기대했지만, <극락왕생>은 모든 보살들과 호법신들을 여신으로 상상함으로써 한국 여성들의 몸을 가진 영적 안내자들을 상상합니다. 이들은 가부장적인 전통과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바라보는 불교 교리를 무화시키며 새로운 페미니스트 불교 영성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특히 최고 지혜의 보살인 문수가 여성으로 재현되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고전적으로 불교에서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존재는 일단 남성이어야 했고, 따라서 문수보살 역시 남성의 신체를 가진 것으로 이해되어왔으니까요. 그러나 <극락왕생>의 문수는 여성으로 현현합니다. 또 수행자들을 색욕으로 유혹하는 악녀로 종종 묘사되는 '파순'에 대한 문수의 입장도 고전적인 불교 가르침으로부터 분리됩니다. 문수는 파순이 보살들을 망가뜨리려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종교로서의 불교가 묘사하는 파순은 진짜 파순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고 말하며 만화 속 세계관에 여성혐오적인 종교의 잔재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애초에 차단해버리죠: "그건 싯다르타랑 싯다르타의 제자들이 만든 거잖아. 그런 것에는 아무 의미도 없어" (제9화; 32화). 작품은 기성 종교가 정당화한 여성혐오적 담론들을 물 흐르듯 해체해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신과 영성을 심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와 자비 사이에서

그러나 <극락왕생> 여성 보살들이 모두 전능하거나 완벽한 여신으로 재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극락왕생>은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들이 미숙한 과정을 거쳐 서로를 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작품은 신, 존자, 귀신들과 교류하는 주인공인 여성 인간 박자언의 이야기이며,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가 신에게 마냥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돕고 귀신도 도우면서 삶과 믿음에 대해 사유하는 모습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극락왕생>의 신들은 분명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계는 그들이 인간의 모습을 한 인격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불완전성을 아주 작게나마 닮을 수밖에 없어서 생기기도 하고, 신 나름의 트라우마가 그의 힘에 제약을 걸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주 원형적이고 근본적인 진리로서의 자비를 잊고 교리로서의 정의만을 추구하다 생기기도 하죠. 후자의 경우는 도명존자에게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지옥도를 다스리는 지장보살을 가장 가까이에서 돕는 존재(협시)인 도명 존자. 초반의 도명은 작품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보다도 근본주의적이며 '종교'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그의 세계는 명확한 선과 악으로 나뉘어 있으며, 그 사이 "회색 지대"는 무작정 으로 규정됩니다 (고사리박사, 제1화; 1화). 윤회라는 우주적 법칙을 비껴가는 존재인 귀신을 죄인이라 보는 그는 "죄지은 자는 벌을 받아야 해"라는 굳은 신념으로 2호선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에서만 나타난다는 '당산역 귀신'을 잡아들입니다 (제1화; 1화). 하지만 인간도를 떠도는 귀신들을 연민하고 보호하고 있던 관음보살에게 들켜 한 가지 미션을 받게 되죠. 당산역 귀신이었던 박자언에게 한 해의 시간을 돌려줄 테니, 그가 되살아난 해가 끝나면 그를 극락왕생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1화; 2화).

<극락왕생> 제1화 "당산역 귀신" (2화). 관음보살(왼쪽)이 도명존자(오른쪽)에게 박자언을 극락왕생시킬 것을 명하고 있다.

첫 에피소드 "당산역 귀신" 편에서부터 작가는 '종교적 교리에 충실한 것'과 '사람을 사랑하고 연민하는 자비'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도명은 종교적이지만 자비심이 부족하고, 종교의 가장 중심에 우뚝 서 있어야 할 관음보살은 되려 교리나 규칙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자비에 관음의 신적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근본주의로부터 분리된 영성을 말합니다. 즉 신을 종교 교리와 원칙을 수호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수호하는 존재로 상상하고 있으며, 바로 그런 신을 닮아 타인의 아픔에 가까이 다가가는 행위야말로 진정 영적이고 숭고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음의 명령으로 도명은 그가 미처 깨우치지 못한 자비의 마음을 배우기 위해 자언과 함께 인간 세계로 내려가게 됩니다. 


호법신인 도명이 자비를 배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 참나무 석장으로 찔러버렸던 자언입니다. 왜 죽었는지, 왜 귀신이 되었는지, 왜 한 해를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건지, 그 한 해는 왜 하필 그가 고3이었던 해인지 무엇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자언은 귀신들을 무작정 멀리하지 않고 그들의 사연을 들으며 그들의 아픔에 공감합니다. 귀신들은 각자의 이유로 어딘가 결핍된 영혼들로 그려집니다. 이유를 모른 채 특정 행동을 강박적으로 반복하거나 (제2화, 제3화, 제19화), 애도를 마치지 못해 죄책감과 우울 속에 남겨진 소중한 이를 찾아 헤매기도 하고 (제6화, 제14화), 세속화된 세상에서 아무도 신령스러운 장소를 찾지 않아 쇠약해진 상태이기도 하죠(제9화).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는 자언의 말은 원칙주의자인 도명을 움직입니다 (제6화; 17화). 도명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은 그가 평생 익혀온 규칙과 진리가 아니라, 자언이 가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지요 (제2화; 5화). 그렇게 인간은 신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고사리박사 작가는 깨달음이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내려오는 것이라는 기존의 생각을 뒤집어, 인간의 영성이 종교적 교리에 갇힌 신에게 그 교리 바깥으로 나와 사람의 사연을 들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요청할 수 있음을 보여주죠. 그렇게 인간의 영성은 종교의 단단한 원리원칙을 넘어서 신에게 다가갑니다.

<극락왕생> 제2화 "내기 한 판" (5화). 도명은 자언이 귀신들의 사연에 귀 기울이면서 그들이 남을 해치지 않도록 부드럽게 타이르는 모습에 무언가 깨달았다고 말한다.

자비의 근원, 순수

그렇다면 자언의 자비심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신도 아니고, 이젠 귀신도 아니며, 아직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이 왜 일어나는지도 감히 알 수 없는 연약한 인간에게서 우리는 어떻게 신을 감동시킬 만한 자비심과 사유를 발견하게 될까요? 고사리박사는 그 힘의 근원을 '순수,' 그리고 순수를 '믿고 싶은' 마음에서 찾습니다.


제11화 "산할머니"에서 자언과 도명은 도명이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신통한 힘의 약수를 구하러 늦은 밤 해왕산으로 향합니다. 약수터에서 그들은 민간설화를 연구하는 중년 여성이자, 자언이 대학생이던 시절 수강했던 수업을 가르쳤던 교수와 마주치게 되죠. 교수는 그들에게 해왕산 할머니 산신령 설화를 들려줍니다. 남편에게 버려진 병든 아내가 할머니 산신령에게 받은 약수를 마셨더니 병이 나아 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죠. 하지만 귀신과 대화할 수 있는 자언과 도명에게 산할머니는 설화가 왜곡되었다고 말합니다. 약수라 알려진 것은 사실 "평범한 물"이며, 자신이 설화 속 여자에게 자신이 "마실 거랑 먹을 걸 약간 챙겨줬"긴 하지만 "그 여자는 자기가 살 의지가 있어서 산 거라고" 말합니다 (제11화; 42화). 산할머니의 이야기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우리 삶을 신기하고, 또 버틸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두 가지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는 '신의 권능에 마냥 기대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가'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곁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신이 있다'는 것이죠.

<극락왕생> 제11화 "산할머니" (42화). 산할머니는 설화 속 여성이 살아난 것은 자신이 건넨 물 때문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 살 의지 덕이었다 말한다.

산할머니의 말대로 설화 속 여성이 살아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의지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의지를 다질 수 있었던 건 분명 산할머니의 연민과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여성이 여전히 여성 신이 필요한 이유는 여성이 연약해서가 아닙니다. 어차피 인간은 언제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다만 남성들이 남성 신에게서 '인간'의 지위를 받고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도움을 받듯, 여성 역시 여성이 자신 안에 잠재된 생에 대한 갈망, 자유로움과 주체성, 모든 불행을 극복하고 그다음으로 나아갈 힘을 일깨워줄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는 여성 신이 필요합니다. 프랑스 페미니스트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루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는 "그 어떤 인간 주체성과 인간 사회도 신의 도움 없이 건립되지 않았다"며 여성 신의 부재는 여성이 여성으로 "자라나는" 일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무한함"을 "마비시킨다"라고 말합니다 (Irigaray, 62쪽).** 살아있기만 하면, 살아나간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무한함, 그 무한한 가능성이 주는 충만함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여전히 여성 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산할머니는 부인하지만, 그는 설화 속 여성이 살아갈 힘을 찾기 위해 반드시 만나야 했던 바로 그 신이 되어주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 교수는 자언과 도명에게 어린 조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교회 문턱도 밟아본 적 없는 다섯 살짜리 조카가 어느 날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모습을 발견한 교수는 아이에게 뭐라고 기도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내일이 소풍날이니까 비가 안 오게 해 달라"라고 빌었답니다 (고사리박사, 제11화; 42화). 마냥 귀엽다고만 생각할 수 있지만 교수는 이 일로 오싹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 "순리대로, 이치에 맞게.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하는 대로... 사리에 맞게, 바르게 가야 하는 대로... 온당하게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 (제11화; 42화)이 종교의 의례도 의미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에게조차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죠. 교수는 그 마음을 "순수"라고 부릅니다 (제11화; 42화).

<극락왕생> 제11화 "산할머니" (42화). 교수가 자언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순수'와 믿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순수는 본래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을 뜻하지요 ("순수," 표준국어대사전). 고사리박사 작가의 순수는 '좋은 내일을 바라는 마음'이자, 동시에 악하고 허망하고 또 괴로운 세상에 "굴종하지 않을 무결한 용기"입니다 (고사리박사, 제11화; 42화). 에피소드 마지막의 내레이션은 그 순수를 지켜주기 위해, 즉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앞으로의 일들이 보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을 지켜주기 위해 신이 존재한다고 말하죠. 그래서 세상이 좀 더 옳은 방향으로 변화하길 바라며 "싸우는 사람에게는 순수가 필요하다," "순수를 채우기 위해 신이 존재한다"라고 말합니다 (제11화; 42화).


자언이 귀신들과 다른 모든 인물들을 대하는 자세에서 우러나는 선함의 기원 역시 이 '순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다쳐선 안 되고 아무도 지옥에 가선 안 되는데. 그렇게 슬픈 기분은 이 세상 누구도 느껴선 안 되는데" (제2화; 4화)- 이것이 자언 안에 있는 순수입니다. 자언이 귀신들에게, 또 도명에게, 어딘가 불안정하고 위험해 보이는 모든 이들에게 냅다 다가갈 수 있었던 모든 힘은 그가 생각하는 '순수'를 향한 의지였습니다. 이는 2019년도 만화 평론 공모전 수상작인 "<극락왕생>, 순수에 대한 곧은 믿음"에서도 언급된 바 있습니다:

‘자언’이 어떠한 부조리를 마주칠 때마다 하는 대사가 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해...,” “그런 식으로는 되는 게 아니죠”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자언’의 순수에서 비롯되는 발언이다. ‘자언’ 안의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자 하는 마음이 그의 행동에 필연성을 확보해준다. (손유진, 82쪽)

이처럼 자언의 '순수'는 그가 남을 도울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자 윤리적 기반입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평론이 뒤이어 "신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앎의 공백에 자신을 채워버린다"라고 말한 것과 달리 (82쪽), <극락왕생>은 비워진 공백을 채울 신 역시 제공합니다. 그 신이 순수를 채웁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비어있는 공간에 자신'만'을 채우는 것은 아니라는 것까지 역설합니다. 교수의 경험담을 듣던 자언은 다음과 같이 중얼거립니다.

나랑 비슷한 신이 어딘가에서 나를 도와주려 하고 나를 살펴주려 하고 나처럼 기뻐하고 나처럼 슬퍼하면서 그래서 좋을 때도 있고 미울 때도 있고 그래서 불쌍하기도 한 그런 신이 있다는 걸 안다면... 만일 그런 신이 곁에 있다는 걸 안다면 아마 친구가 있는 기분일 거예요. (고사리박사, 제11화; 42화)

자언이 믿기로 하는 것은 자신 안의 순수이지만, 순수'만'은 아닙니다. 자언은 자신 안에 있던 순수가 "사실은 계속해서 나를 구해주고 있었던 거예요"라 말하지만(제14화; 54화), 그 "순수를 채우기 위해 신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분명 알고 있을 테지요 (제11화; 42화). 그의 곁에는 자신과 함께 하며, 자신을 상처 주지 않으려 하고, 자신을 극락왕생시키려 노력하는 도명이 있으니까요. 자언은 순수를 믿는 만큼 도명을 믿습니다. 도명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얼마나 제 또래같이 미숙한지, 또 한편으론 얼마나 권위주의적이고 알 수 없는 말만 하며 화를 내는 다혈질인지를 알면서도 도명을 믿습니다.


<극락왕생> 제11화 "산할머니" (42화). 자언이 도명을 보며, 자신을 위해주는 신이 곁에 있는 것은 친구가 생긴 기분일 거라고 말하고 있다.

믿는다는 것은 긍정하는 것입니다. 긍정 없이는 하루를 버틸 수 없고요. 하다못해 내가 불완전하고, 불행하며, 불안하다는 사실이라도 긍정해야 하지요. 연대 역시 다른 사람 괴로움을 긍정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는 거고요. 그래서 자언은,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워대고 의지가 되기보단 얄밉기 그지없는 "반쪽짜리 보살"이 된 문수 역시 믿고 있습니다 (제9화; 33화). 문수가 믿음직한 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믿지 않으면 사람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렇게는 살 수 없잖아요. 주변에 있는 모든 걸 불신하고 의심하고 탓하면서 사람이 그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사람이 그렇게 살면은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전 앞으로도 그냥 다 믿고 살 거예요. 안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해요? 아침은, 아침이... 아침이 계속 오는데... (제9화; 33화)

자언은 귀신과는 싸우지 않지만, 자신을 덮쳐오는 알 수 없는 모든 일들 앞에 굴복하지 않도록 언제나 힘껏 우울, 의심, 슬픔과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싸우는 사람인 자언에겐 순수가 필요합니다. 불행하고 불안한 사람들이지만 함께 있기에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순수가 자언의 '윈윈(win win)' 전략이 되지요. 그렇기에 자언은 문수의 말을 믿고, 그의 불안을 긍정하며, 바로 그 불안이 문수와 자신의 연대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데 희망을 겁니다.

저는 죽었다 살아난 반쪽짜리 인간이고 보살님은 힘을 잃어버린 반쪽짜리 보살이니까 우리는 서로를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제9화; 33화)

이처럼 비어버린 앎의 공백을 반드시 자신으로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신이 존재하니까요. 적어도 <극락왕생>의 세계에서는요. 불완전하고 반쪽짜리이지만 그렇기에 자신의 고통과 맞닿아 있는 신을 자언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가 많이 힘들었을 것을 긍정하고, 그가 나를 도와주고자 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자언은 자신을 지탱할 순수를 찾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존재와 연대할 때 발견되는 새로운 힘 역시 얻게 됩니다.

<극락왕생> 제9화 "비밀을 지켜줘" (33화). 반쪽짜리 인간 박자언(왼쪽)이 반쪽짜리 보살 문수(오른쪽)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다. 어째 자언보다 문수가 더 긴장했다.

믿고 싶은 여자들

자언은 혼자서도 올곧고 선하며 삶에의 의지가 충만합니다. 그러나 그가 순수를 위해 싸우려면 자비의 여신인 관음이, 미숙하지만 정의로운 도명이, 좀스럽지만 자언을 소중히 여기는 문수라는 신이 필요합니다. 마치  설화 속 산할머니와 여성의 관계처럼요. 여성이 산할머니에게 의존해서 살아난 건 아니지만, 산할머니가 채워준 순수가 그의 삶에 스며들어 그가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게 해 주었듯 말입니다. 나를 아껴주고 도와주려 하는 여성 신의 존재는 여성 인간의 삶에 충만함을 선사합니다. 살아서 무언가를 믿고 긍정할 힘을 보태줍니다. 그것은 무한과 초월이 가능함을 약속받는 기쁨이며, 세상을 "멋지게 뒤집어"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패기이기도 하지요 (제11화; 42화). 그래서 이토록 세속화된 세상에서도 여전히 여성 신에 대한 갈망이 존재합니다.


극도로 세속화된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극락왕생>은 우리가 믿을 수 있고, 믿고 싶은 여자들과 여신들의 이야기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인공들의 대화와 독백이 전하는 메시지가 정말 그럴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믿고 싶어지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를 긍정합니다. 슬픔도 긍정하고, 우울도 긍정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슬픔 또한 영원하지 않고, 변하고 -, 잊혀진다는 사실" 역시 긍정하고 (제19화; 75화), "나랑 비슷한 신이 어딘가에서 나를 도와주려 하고 나를 살펴주려 하고" 있다는 것도 긍정하지요 (제11화; 42화). 그런 신이 있다고 믿고, 그런 신을 따라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우리를 지탱합니다. 서로의 얼굴도 삶도 모르던 여자들은 그렇게 이 작품을 통해 연결되고, 비슷한 고민을 나누고, 비슷한 희망을 선물 받습니다. "나랑 같은 연결 고리를 가진 여자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비슷한 고민을 하며 살고 있다는 상상을 하면 막막하다가도 웃음이 난다" (제5화; 15화). 어쩌면 이건 <극락왕생>의 모든 독자들이 작품을 보면서 얻게 되는 새로운 믿음입니다. 어떤 종교도, 교리도 필요 없이, 오직 순수에 대한 믿음만으로 가능한 연대를 작품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방법으로 실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워질 때, 우린 <극락왕생>을 다시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이 건네는 '순수'를 믿게 되었으니까요.



*"Just as elite men shaped religious traditions to align with their own interests, so can feminist women reinterpret and reconstruct such traditions to support feminist aims." (Alka, "Re-enchanting Feminism: Challenging Religious and Secular Patriarchies" 39쪽; 자체번역)

**"Divinity is what we need to become free, autonomous, sovereign. No human subjectivity, no human society has ever been established without the help of the divine. There comes a time for destruction. But, before destruction is possible, God of the gods must exist. ... There is no woman God, no female trinity: mother, daughter, spirit. This paralyzes the infinite of becoming a woman since she is fixed in the role of mother through whom the son of God is made flesh." (Irigaray, <Sexes and Genealogies> 62쪽; 자체 번역)



https://webtoon.kakao.com/content/%EA%B7%B9%EB%9D%BD%EC%99%95%EC%83%9D/2680

참고문헌

고사리박사. <극락왕생>. 카카오웹툰, 2021~. https://webtoon.kakao.com/content/%EA%B7%B9%EB%9D%BD%EC%99%95%EC%83%9D/2680.

김신명숙. <여성 관음의 탄생: 한국 가부장제와 석굴암 십일면관음>. 이프북스, 2019.

손유진. “<극락왕생>, 순수에 대한 곧은 믿음.” <2019 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작 모음집>. <지금, 만화>, vol.5, 80-84쪽.

"순수." <표준국어대사전>, 네이버 국어사전. https://ko.dict.naver.com/#/entry/koko/2fef7a2437fe415b8daddd91a0dce170.

"영성 [spirituality, 靈性]." <상담학 사전>, 김춘경, 이수연, 이윤주, 정종진, 최웅용 지음, 네이버 지식백과, 2016,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673928.

Arora, Alka. “Re-enchanting Feminism: Challenging Religious and Secular Patriarchies.” <Postsecular Feminisms: Religion and Gender in Transnational Context>, edited by Nandini Deo, Bloomsbury, 2020, pp. 32-51.

Deo, Nandini. “Postsecular Feminisms: Religion and Gender in Transnational Context.” <Postsecular Feminisms: Religion and Gender in Transnational Context>, edited by Nandini Deo, Bloomsbury, 2020, pp. 1-14.

Gross, Rita M. <Buddhism After Patriarchy: A Feminist History, Analysis, and Reconstruction of Buddhism>. State U of New York P, 1993.

Irigaray, Luce. <Sexes and Genealogies>. Translated by Gillian C. Gill, Columbia UP, 1993.


- 작품에 대해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고사리박사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 <극락왕생>은 카카오웹툰(컬러판)과 카카오페이지(컬러판, 흑백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전 08화 신(神) 없는 세계를 준비하는 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