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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라 Aug 25. 2022

신(神) 없는 세계를 준비하는 신

목인 작가의 <태양의 시>

주의: 이 글은 해당 작품의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늘 인간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인간을 구하고자 마음먹고 나니, 인간의 시작과 끝이 어느 쯤인가 명확해야 했기 때문이다.
<태양의 시> 1부 26화


윤리(倫理)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합니다. 윤리학은 인간 행위의 규범, 우리가 도덕이라 부르는 것,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다루는 철학이지요. 그런데 ‘사람’은 누구인가요? 우리가 배웠던 윤리학이 말하는 인간은 누구를 의미하나요? 철학자들은 인간의 정체성을 더 이상 자명하고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기준으로 모든 윤리가 정해졌지만, 정작 사람(human/mankind/man)의 개념이 포함하는 신체들은 사실 특권층의 신체뿐이었다는 것을요. 특히 서구 철학의 인간중심주의는 기독교 세계관에 뿌리내리고 있어 남성 신(神)의 모습을 기준으로 인간의 정의, 인간의 규범, 이상적인 신체의 모습을 구축해왔고,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백인 헤태로섹슈얼 중산층 비장애인 기독교 남성으로 대변되었습니다. 유일무이하고 전지전능하며 인간을 창조하고 ‘올바른’ 문화의 기준을 제공하는 절대적 존재가 아버지(가부장)의 모습으로 재현되면서, 신을 닮지 못한 모든 신체는 모두 타자, 열등한 것, 인간 이하의 것으로 치부되었죠.


그런데 '신은 죽었다'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언과 함께, 신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인간(man)의 윤리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근원을 신에게서 찾곤 했기에, 신의 죽음은 곧 인간의 범주, 인간의 정의 자체를 흔드는 일이었죠. 그리고 신 중심주의적 사고의 포기는 곧 신을 모든 선악의 기준 삼는 윤리학의 포기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한다면, 그리스도교 도덕에 대한 권리의 근거도 없애버려야 한다. 그리스도교 도덕은 그 자체로는 결코 자명한 사실이 아니다” (니체, 145쪽). 당시의 니체가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대안적 윤리학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통찰은, 신을 중심으로 하고 또 신의 권위로 특권을 입은 ‘인간(man)’ 중심의 윤리가 그 자체로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은 단순한 세속주의 선언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부여되어 있던 자명한 지위의 종말, 유럽 휴머니즘적 주체가 형이상학적으로 안정되고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믿음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브라이도티, 14쪽). 이에 페미니스트 포스트휴먼 철학자 로지 브라이도티는 임의적이고 편파적으로 부여되었던 인간의 위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이제껏 비-인간으로 여겨져 타자화되었던 신체들을 주체로 삼는 새로운 윤리학이 필요함을 주장합니다. 신을 닮은 몇몇 신체들만을 포옹하는 편협한 윤리학이 아닌, 살아있고 소통할 수 있는 모든 신체를 (여성의, 유색인종의, 퀴어의, 장애인의, 노동자의, 앞선 모든 정체성의 교차점들에 선 이들과 또 다른 이유로 타자화된 이들의, 그리고 동물과 식물의 신체까지) 그들 삶의 진정한 주인, 주체로서 바라보고 환대하는 새로운 윤리학이요. 신이 죽었다면, 인간의 오래된 정의가 유명무실해졌다면, 우리는 신이 없는 세계의 새로운 윤리를 찾아야 합니다. 니체의 선언에 절망할 틈이 없습니다. 브라이도티가 말하듯, 정말 중요한 것은 니체의 선언 이후의 삶이니까요:

“그 이후 철학적 논제의 주요 항목은 줄곧 첫째, 존재론적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충격 이후 어떻게 비판적 사유를 발전시킬 것인가, 둘째, 의심과 불신이라는 부정적 감정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친화력과 윤리적 책임으로 결속된 공동체 의식을 재구성할 것인가가 되었다” (브라이도티 14).

윤리는 언제나 관계적입니다. 늘 타인을 필요로 하지요. 타인을 나와 같이 스스로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가진 하나의 주체로 바라볼 때, 타인을 어떤 개념이나 감상, 특정 인종이나 젠더로 축소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윤리적인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Crossley, 3쪽). 신이 없대도 내 곁에 여전히 남아 숨 쉬는 바로 그 존재와 관계하기 위해 우리에게 친화력과 윤리적 책임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신이 없는 시대의 윤리, 신을 닮은 신체만을 인간이라 부르지 않는 시대의 윤리를 우리는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철학의 언어로 쓰인 윤리학을 웹툰은 어떤 이야기로 재현해내고 있을까요? 목인 작가의 <태양의 시>에서 우리는 신의 죽음과 신 이후의 윤리를 찾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태양의 시> 표지

그런데 <태양의 시>에 나오는 신은 아주 특이합니다. 이 작품에서 타자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윤리, 즉 '신 이후의 윤리'''은 양립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은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인간이 아닌가를 스스로 질문하고, 한때 배제되었던 다양한 신체들을 환대하는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봉사자로 등장합니다. 게다가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백성들이 고정되고 편협한 '인간'의 정의를 빌어 서로를 차별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존재는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자리를 비켜주죠. 신의 권위를 등에 업은 차별과 혐오가 여전히 만연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독자들의 눈에 <태양의 시>의 신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생소합니다. 인간을 함부로 정의 내리지 않는 신, 남성의 신체로 재현되지 않는 신, 타자의 얼굴을 하고 사람 간의 연대를 응원하는 신을 목격하는 경험은 흔치 않고 특별한 경험이지요. 작가는 매력적이고 탄탄한 동양 판타지 세계관에서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신을 그려냅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올 신의 죽음 이후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질문합니다.

<태양의 시> 2부 12화. 벼락을 부리는 천년 왕, 태왕의 모습이다.

<태양의 시> 속에서도 신은 유일무이한 절대자이자 ‘인간’의 기준으로 상정됩니다. 태왕(太王)이라 불리는 신은 벼락을 부리고 천년을 살아온 초월자입니다. 이때 벼락은 우리가 아는 자연현상으로서의 벼락은 아니고,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또한 사람을 창조하는 힘을 가진 신선술을 뜻합니다. 신은 벼락으로 자기 백성을 창조하고, 세계를 유지하고 또 그 힘을 국가를 이끌 몇몇 사람들(귀족)에게 나눠 주었다고 알려집니다. 벼락으로 만들어진 인류는 신의 백성이며, 어딜 가나 인간으로 여겨지며 인간다운 대접을 받습니다.


그런데 <태양의 시> 세계관에는 신선술과 대비되는 ‘주술’도 존재합니다. 주술은 벼락이 아닌 불을 부리는 능력으로, 이 불은 일반인을 해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불을 다루는 힘을 가진 개체들인 주술사들은 ‘화마(火魔)’라는 경멸 어린 이름으로 불리며 북녘땅 구덩이에 격리되곤 합니다. 태왕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는” 것들, 국가에서 나고 자랐으나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죠 (1부 8화). 이 세계관에서 주술사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이고, 괴물이며, “마귀이기 때문에 수색하고 한 구덩이에 몰아넣고 죽을 때까지 가두는 일이 당연시”됩니다 (목인, 1부 12화). ‘일반인’들은 주술사는 불을 다루는 무시무시한 무뢰배일 것이라는 불안을 공고히 하며, 그들을 각자의 서사와 성품을 가진 개개인이 아니라 화마라는 집단으로 일반화합니다. 이방인을 타자화하는 과정이 웹툰 속에서 재현되는 것이죠:

“자극과 긴장, 불편함과 낯섦을 수용하지 못하는 토박이 문화에서, 이방인을 의심스럽고 위험한 존재로 판단하고, 때로 이 의심이 혐오로 자리를 옮기게 될 때, 이방인은 개인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유형의 집단’으로 인식된다. 이들은 집단으로 뭉뚱그려 표상되고, 개개인의 차이와 고유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김애령, 161쪽)
<태양의 시> 1부 12화, 북녘 땅의 파수꾼 연기야라는 주술사를 화마라고 부르며 차별하는 사회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작품이 전개되면서, 국가의 근간이자 유일한 군주인 태왕 역시 주술사였음이 밝혀집니다. 태왕이 되기 전 그는 본래 불을 다루는 주술사로 출현하였으나, 자신의 백성들에게 불이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후 신체를 태우지 않는 새로운 마법인 벼락을 만든 것입니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불을 다루는 힘은 부정한 것, 벼락은 신성한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의 분신이자 주술사의 몸으로 현현한 계유가 숨겨져 있던 태왕의 유래를 알려줌으로써, 신은 화마라 불리며 핍박받는 타자들의 신체를 가진 존재였음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타자의 얼굴을 한 자가 신이라는 사실은, 이제껏 주술사들이 받아왔던 박해와 편견에 정면 도전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이 세계관에서 신의 존재는 차별받던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와 주체성을 논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는커녕 기폭제가 됩니다.

<태양의 시> 1화, 계유의 첫 등장. 계유는 태왕의 분신으로, 태왕이 아직 신이 되지 않고 불을 다루는 인간이었던 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작품 내 세계관에는 젠더 갈등이 없는 듯하나, 신의 인간일 적 모습을 간직한 신의 분신 계유가 여성이라는 설정이 작품 밖의 독자들에게는 놀라움은 물론 어떤 뭉클함을 안겨줍니다. 작품 밖의 세계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에서, 여성은 여전히 주변화되고 여전히 이방인이기 때문이죠. 작품 바깥 세계의 가부장제에 대한 인식이, 작품 속 세계에서 차별받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대변할 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중요하게 만듭니다. 계유가 여성임이 처음 드러났던 1부 5화에서 (좋은 의미로) 난리가 났던 댓글창이 기억나네요. 화려한 액션으로 눈을 사로잡는 검사가 사실 세계 전체의 존속을 좌우할 권능을 가졌는데, 그는 사실 핍박받는 소수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니. 그런데 그게 여자라니!  


무엇이 인간인가, 무엇이 인간 대접받을 자격이 있는가, “왜 지금도 어떤 이들은 충분히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가를 새롭게 질문하는 이 시대에(브라이도티, 8쪽), 독자들은 <태양의 시>에서 인간의 경계를 질문하고 편견에 맞서 모두를 위한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이방인의 신체를 가진 신을 봅니다. 계유를 통해 우리는 이제껏 상상해본 적 없는 인격신을 사유하게 됩니다. 스스로 핍박받는 인종의 신체를 가지고 현현하고,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기느라 권위나 통치나 영원성에 욕심을 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신 말입니다.

<태양의 시> 2부 27화, 태왕은 계유가 주술사들을 이해하고 그들 역시 사람임을 긍정할 존재이길 바랐기에 그에게 자신이 주술사였을 적의 신체를 부여했다고 말한다.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작품 내에서 여러 인물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되풀이되지만, 작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인간이라고 결코 못 박지 않습니다. 계유라는 신의 분신을 여성 주술사로 상상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기준을 오롯이 계유에게서만 찾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인간’의 정의를 구체적으로 내리는 순간 반드시 누락될 신체들에 대해 사유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인도하죠.


무엇이 인간인가, 누가 백성인가, 누가 사람다운 대접을 받는가 등의 질문들은 태왕이라는 절대 기준 아래 이제껏 자명한 답들만을 내놓았지만, 그러한 획일적인 답들은 주술사를 비롯한 수많은 신체를 비-인간으로 치부해왔습니다. 벼락을 다루는 귀족 관료들과 아무 힘도 타고나지 않은 일반인까지를 인간으로 규정하면 불을 다루는 주술사는 비-인간이 됩니다. “이목구비가 얼굴 정면에 있어야, 팔이 둘, 다리가 둘이어야 사람인가?”하면 (목인, 1부 11화), 팔이 하나 없는 귀족인 마하는 비-인간이 되고요: “팔이 하나 없으매, 스스로가 완전한 인간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3부 17화). 국경 밖의 존재들, “그 형태가 상당히 유동적이라 어떤 환경에 사는지 어떤 재앙을 맞이하는지에 따라 모양이 늘 변하기 십상”인 이들도 인간이 아닌 것이 되겠지요 (2부 9화). 그들과 언어를 매개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그들이 먼저 호의를 베풀더라도 말입니다 (2부 23화). 작가는 해결되지 않는 물음을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둡니다. 아니 사실 작가는 '이 물음은 해결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무엇이 인간인지 결정하는 것보다, 지금 당장 내 곁에 살아 숨 쉬는 존재들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계유도 인간인 것과 인간 아닌 것의 뚜렷한 경계를 알고 있는 인물처럼 보였습니다. 초반의 그는 “인간이 아닌 것엔 가차 없”습니다(1부 25화). 그래서 이무기(의 형태를 띤 생물들로, 용의 족속이다. 용을 신성시하기 때문에 무리를 이루어 용의 사막으로 이동하는 습성이 있다)로 변태 중인 인물인 길라잡이를 외면하고 싶어 하며 원래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술사에 의해 부려지는 어둑서니(불의 힘을 갈망하는 검은 그림자)는 완전히 파괴하기도 하죠. 하지만 작품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계유는 그의 국가가 지금까지처럼 “조금 다르다 해서 서로를 가르고 낯선 자격을 부여하면서” 살아가선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3부 17화). 인간을 정의 내리고 그 정의에 합격한 신체들만을 비호하는 방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음을 인정하게 되죠.

<태양의 시> 3부 17화. 팔이 하나 없어 괴로워하던 마하를 생각하며 계유가 말하고 있다. 검게 표현된 경계 바깥으로 밀려난 마하가 보인다.  

신의 마지막 현현인 계유가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신 없는 세계, 신을 인간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지 않는 시대를 준비해야겠다 마음먹은 것은, 신의 본체가 아니라 분신인 자신에게 남은 유한한 수명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여전히 ‘신’을 기준으로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려 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알고 경계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계유는 한 사람(그가 신이라 할지라도)에게만 온 세계의 존속이 달려 있는 구조는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나선 여정에서, 계유는 주술사들을 공동체의 온전하고 평등한 일원으로 생각하며 하나의 우두머리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협치를 일구어내는 북녘의 사람들을 관찰하게 됩니다. 그들을 보며 계유는 유일신의 신화와 권위가 되려 사람들의 자주적이고 협력적인 공존을 지연시키고 있지 않은가 자문합니다. 그래서 그는 신이 없는 세계를 준비하기로 하고, 그 희망을 북녘 공동체에서 찾게 됩니다: “인간의 국가가 태왕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2부 7화). 그는 일반인이 더는 서로를 차이를 근거로 주술사를 차별하지 않고 또 국경 밖의 존재들을 괴물처럼 취급하지 않도록 새로운 윤리, 새로운 덕을 세우는 과정을 돕기로 합니다.

<태양의 시> 2부 7화, 계유는 연기야라에게 사람들이 신 없이도 연대하며 함께 살아가는 국가를 이끌 능력이 있음을 알아본다.

우선 계유는 여러 재난으로 무너졌던 도시 남도(南都)를 재건하는 사업을 추진하여 벼락을 다루는 귀족과 일반인들이 북녘에서 내려온 주술사들과 함께 협업할 수 있도록 합니다 (3부 2화). 주술사를 화마라고 부르며 인간 아닌 것으로 취급하던 사람들은 모두 이전의 편견으로 높이 쌓인 “벽을 허물고 그 존재를 마주 볼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3부 15화). 이 과정은 혼란과 의심을 수반하고, 주술사는 괴물, 자신들은 인간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사람들은 “벽을 허물기에 앞서 이걸 허무는 게 과연 옳은지조차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죠 (3부 15화). 하지만 작품은 그러한 고민마저 기득권층의 특권이고 오만임을 지적합니다: “그걸 왜, 혼자 고민하죠? 우리는 당신과 함께하려고 여기 왔는데?” (3부 15화). 주술사와 일반인의 진정한 공존은, 한때 동등한 인간의 권리를 누리지 못했던 이들에게 권리를 ‘수여’하는 시혜적 행위로 이루어져선 안 된다는 날카로운 통찰이 엿보이는 장면입니다. <태양의 시>가 제시하는 윤리학은 ‘인간’이라는 모호한 범주 안에 소수자들이 그저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체가 서로를 자신에 대한 권리를 가진 동등한 인격체로 보고 서로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으로서의 윤리학인 것이죠.

<태양의 시> 3부 17화, 주술사(태고인)와 일반인(벼락인)이 함께 공존하길 바라는 계유의 말. 아래는 남도의 수장인 부여몰과 북녘에서 내려온 주술사들의 대표 진해다.

또 국경 바깥의 외국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예전과 달리, 계유는 외국인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북녘 사람들을 지지하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을 완화하려 합니다 (3부 7화). 신의 직접 통치 이후의 지도자인 군왕 즉위와 함께 언어적 차원의 개혁도 이루어집니다. 일반인은 '벼락인'으로, 주술사와 화마는 이후 '태고인'으로 정정됨으로써 혐오적 단어가 사라지는 것이죠 (3부 28화).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자신을 “언제나 인간의 미래를 위한 조력자”라고 말하는 계유, 신이 있었습니다 (2부 12화). <태양의 시> 세계관에서는 신이 죽어서야 새로운 윤리가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더 많은 신체를 위한 윤리를 위한 자리를 미리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죠. 그리고 이 모든 과업을 마친 후, 신은 죽습니다 (3부 29화).

<태양의 시> 3부 29화, 계유의 마지막 모습.

<태양의 시>의 인물들도 '신은 죽었다'는 선언, 인간이라는 임의적 범주의 한계, 이방인과의 관계에서 비롯하는 공포를 마주하지만, 그 상태에 그저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덕치가 사라진 땅에서 인류는 어떻게 미래를 도모할 것인가?” 묻고, 그 답을 찾으려 함께하고 협력합니다 (목인, 3부 28화). 이때의 '함께'란, 한때 인간이 아니라 여겨졌던 모든 존재들과 함께한단 뜻입니다. ‘무엇을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의 질문은 ‘내 옆에 존재하는 존재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로 대체됩니다. 독자들은 <태양의 시> 속 인물들을 보며 신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고 연대하는 존재들의 모습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태양의 시> 2부 12화, 계유는 자신을 궁금해하는 위사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자신은 언제나 인간의 미래를 위한 조력자라 말한다.

계유가 작중 인물들과 함께 준비하는 윤리가 그러하듯, 현대의 독자들이 일궈야 하는 윤리학 역시 타자와 함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박탈당하는가 질문하고, 부당한 차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차별에 반대하는 것. 그것이 21세기에 걸맞은 환대의 철학이자 신을 기준으로 정해진 '이상적인 인간' 중심주의 너머로 가는 길일 테죠. <태양의 시>가 전하는 메시지는 여전히 장애, 젠더, 인종 등을 이유로 차별당하는 사람들과 그러한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작금의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립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도, 소수자들과 함께 하는 삶은 “진짜 골치 아프다”라고 생각하며 땀을 뻘뻘 흘리는 사람들의 사회입니다 (3부 2화). 하지만 그런 사회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이 주는 희망이기도 하지요.


목인 작가는 <태양의 시> 외전에 실린 Q&A에서 작품의 세계관은 건국 신화와 아포칼립스를 섞다 보니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태양의 시>는 신 중심 세계의 붕괴와 각종 재난 (아포칼립스), 그리고 이후에 새롭게 세워질 공동체의 탄생 (건국 신화)을 다루고 있죠. 어쩌면 작품 밖의 독자들도 그동안 사회에 만연했던 편협한 인간의 정의를 허물고 혐오를 넘어서 모든 존재를 그저 존재로 볼 수 있게 된다면, 우리 역시 새로운 사회를 지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회를 일구는데 꼭 인격신이 필요하진 않겠지요. 이미 여러 차례 말했듯, 폭력적 가부장의 모습을 한 신은 더더욱 필요하지 않고요. 우리는 신이 없어도 우리 곁에 있는 주체들을 주체로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주로 신학자들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인간과 신의 관계의 연장선으로 바라보고 바로 그 연장성에서 윤리의 필요성을 인식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나와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죠 (Crossley, 11쪽). 나는 인간이 신 없이도 충분히 서로를 존중하며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유와 같은 신을 마음 한편에 두고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이 죽었다는 말을 멋스럽게 반복하면서 정작 신의 이름으로 여전히 말도 안 되는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이나, 그래도 계유와 같은 신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런 신이 우리를 도와주면 좋겠다는 기대, 그런 신이 응원하고 재가하는 차별 없는 시대를 맞이해보고 싶다는 기대 말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윤리학을 준비하는 독자들의 마음속에 계유가 자리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사람이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비-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함께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응원하는 신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어쩐지 벅차오릅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신이 필요하다면, 그런 신이어야 하겠지요.

<태양의 시> 1부 20화, 태왕이 자신의 죽음 이후의 인류를 걱정하는 장면이다. 그의 분신 계유는 신의 죽음 이후에도 인류가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https://webtoon.kakao.com/content/%ED%83%9C%EC%96%91%EC%9D%98-%EC%8B%9C/1367


참고문헌

김애령. <듣기의 윤리: 주체와 타자, 그리고 정의의 환대에 대하여>. 봄날의 박씨, 2020.

니체, 프리드리히.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 (1888~1889)>. 책세상, 백승영 번역, 책세상, 2002.

목인. <태양의 시>. 카카오웹툰, 2017-2019.

---. <일식: 태양의 시 외전>. 단행본, 2020.

브라이도티, 로지. <포스트휴먼>. 이경란 번역, 아카넷, 2015.

Crossley, Nick. <Intersubjectivity: The Fabric of Social Becoming>. Sage, 1996.


- 작품에 대해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목인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 <태양의 시>는 현재 카카오웹툰 앱에서 기다리면 무료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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