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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 내보내기

대승(大乘)과 상대에게 맞는 방편(方便)

by 초이

#20241205 #까치 #대승 #방편 #윤회 #수행


아침에 출근하려고 관사 방문을 나서는데, 계단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내 방은 4층이다) 가서 보니까 웬 까치 한 마리가 건물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내 손에는 우산 하나뿐이었다. 저 까치를 어찌할꼬...


다행히 출근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저 까치를 밖으로 내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단 계단 앞 휴게실의 창문을 열고 (당연히 못 알아듣겠지만 기적을 바라며) 까치한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해보았다. 까치는 난간에 앉아서 눈치를 보다가 이쪽으로 좀 오나 싶더니, 90도 꺾어서 복도 끝으로 날아가 버렸다. 복도의 양쪽 끝에는 큰 창문이 있어서 열어주려고 다가가니까 이젠 또 반대쪽 복도 끝으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일단 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까치를 따라서 반대쪽 복도 끝으로 갔다. 까치는 복도 끝 세탁실로 들어갔다가, (내가 따라 들어가니까) 건조대가 있는 옆방을 거쳐 복도로 나가더니 다시 반대쪽 복도 끝_아까 창문을 열어두었던_으로 날아갔다. 어떻게 될지 몰라서 일단 세탁실의 창문도 열었다.


멀찍이서 보니 까치가 아까 열어둔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갔다. 그걸 보고 나는 세탁실과 휴게실의 창문을 닫았다. 날아가는 까치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쪽 창문도 닫았다. 꽤 신기하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 과정에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 창문을 열고 닫는 건 내 몫이었다. 까치가 문을 열고 나간 다음 문을 닫고 날아갈 것도 아니고. (애초에 까치가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내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았겠지) 근데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을 알고 감내하면서 까치를 위해서 창문을 열고 닫는 게, 내 행동으로 인한 과보(果報)는 내가 감당하면서 상대를 위한다는 게 이런 걸까 싶었다.


# 까치를 밖으로 나가게 하려면 까치한테 맞춰야 했다. 까치를 ‘나’한테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까치한테 맞춰서 여기저기 창문들을 열어야 했다. 만약 까치와 관련된 더 어려운 일이었다면, 까치의 습성이나 행동 패턴 같은 걸 더 많이 파악해서 맞춰야 했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나 보살님들께서 각각의 중생의 근기(根器)에 맞는 방편을 통해서 깨달음으로 이끈다는 게, 상대방을 잘 알고 맞춰서 상대를 위한다는 게 이런 걸까 싶었다.


# 건물 안팎으로 드나드는 것을 삶과 죽음이라고 볼 때, 나는 자유로이 드나들지만, 까치는 자유롭지 못하다. 원치 않는데 들어오고, 나가고 싶은데 나갈 수도 없는 것이 업력(業力)으로 윤회(輪廻)하는 것과 원력수생(願力受生)의 차이일까 싶었다.


#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볼 때, 까치는 중생이고, 나는 수행자 정도일까.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은 까치(중생)에게 맞는 방법이 무엇인지 잘 알고 그렇게 하셨을 테지만, 나는 아직 그 수준이 되지 못해서(지혜롭지 못해서) 까치와 같이 헤맸다. 그래도 까치가 나가는 일을(중생이 깨닫는 일을) 도우려고 노력했으니 좀 나으려나? 결국은 나도 내 발로 건물을 나섰으니_출근해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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