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無用)과 공(空)
#20250102 #클래식 #무용 #공
모 카페에서 음악회를 한다기에 J가 예약해서 다녀왔다.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고 선착순으로 앉아야 했는데, 우리가 앉은 자리는 중간 뒤쪽이라 연주자들의 얼굴이 다 보이지는 않았다. 플루트, 첼로, 오보에, 포르테피아노 4명이었는데 내 자리에서는 플루트와 오보에만 보였다. 플루트를 연주하시는 분이 유튜브 Deep에 나오는 윤태용을 닮았다.
나는 이런 ‘문화생활’을 잘 즐기지 못한다. 즐기는 방법을 모른다. 자주 접하지도 않고, 또 낯선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익숙해질 길이 없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일어났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흩어지는 음들의 나열 또한 무용(無用)이지 않은가, 왜 굳이 이걸 돈 주고 들으러 왔는가 등등.
음악 또한 과학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주어진 것들로 생활을 편하게 만드는 과학.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음역 내에서 듣기 좋은 12개의 음으로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 주어진 것으로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게 비슷하다. 하지만 이 또한 흩어지면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이런 것을 찾고, 더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가. 결국 허무하지 않은가?
내가 이렇게 의미가 없다고 느낄 때마다 ‘그렇지 않다’라고, ‘의미가 있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처음에는 ‘나는 이 세상에 유용(有用)을 배우러 온 거’라고 생각했다가, ‘나는 이 세상에 공(空)을 제대로 배우러 온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공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이 연기(緣起)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아서, 만사가 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인(因)이 연(緣)이 닿아 드러나는 대로 잘 풀고, 또 좋은 인(因)을 쌓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첫 곡은 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OST인 [Kazabue]라는 곡이었다. 플루트를 부는 윤태용 씨는 kazabue가 바람이 불어오는, 머무는 곳이라고 의미를 설명하면서, 올해 많은 일이 있었지만 나쁜 일들은 바람처럼 흘려보내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나쁜 일뿐만 아니라 좋은 일들도 흘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처님께서는 순경(順境)에도 역경(逆境)에도 머물지 않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을 구분하고,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버리려고 애쓴다. 둘 다 매여있기는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OST인 [인생의 회전목마]도 연주곡 중 하나였다. 연주가 시작될 때 피아노 독주로 시작했는데, ‘어, 이상한데? 음이 안 맞는데?’ 하는 부분이 있었다. 틀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내가 잘못 들은 건지. 틀린 부분이 있어도 어쨌든 연주는 계속되어야 했다. ‘리셋 후 처음부터 다시 시작’은 없다. (요새 이세계(異世界)를 다루는 장르가 유행하는 건, 지금 주어진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걸까?) 틀렸다, 망했다 싶어도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게 인생(人生)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재즈 음악회를 다녀왔고 오늘은 클래식 음악회였는데, 나는 재즈보다 클래식이 더 취향에 맞는 거 같다. 예측이 가능하고 깔끔하고 딱딱 들어맞는 느낌이 좋았다. 내가 느끼기에 재즈는 자유롭게 선율을 주고받고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는 음악인데, 나는 불안이 많고 선입견도 많아서, 재즈 연주의 자유로움이나 각각의 개성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버거웠던 거 같다.
좀 더 나아가서, 요즘 세상은 너무 jazzy하지 않나 싶다. ‘자유’, ‘권리’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는데, 혹자들은 후자는 생각도 안 하고 전자만 요구하고 그걸 또 받아주는 존재들이 있어 뒤죽박죽이지 않나 싶다.
공연이 끝나가자 플루트 윤태용 씨는 사진/영상을 찍어도 된다고 했다. J는 영상을 찍던데 나는 찍지 않았다. 찰나를 담은 사진, 순간을 담는 영상. 둘 다 과거의 어느 순간을 담는 것인데, 과거를 잡아놓은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신의 실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면 과거를 붙잡고 있을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 또한 무용이 아닌가 싶다가도, 사람이 꼭 미래지향적으로만 살 수는 없지 않나 싶고. 그래도 노래가 흘러가듯, 인생이 흘러가듯 앞을 볼 수밖에 없지 않나 싶고.
마지막 즈음에 연주자들이 재즈를 할 거라면서 스윙(swing)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재즈를 한다고 했으니 jazzy하게 연주하겠구나, 언제 나오지? 했는데 노래가 끝났다. 엥? 앞에 하던 거랑 크게 다를 게 없었는데? 내 귀가 막귀라 그런지 차이를 못 느꼈다. (찾아보니 스윙은 선율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박자 쪼개기 같다) 그래서 ‘클래식 전공자가 재즈를 한다고 하면, 모범생이 일탈했다는 거랑 비슷하게 티도 안 나는 건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