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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도 달라질 수 있다.

화살의 비유

by 초이

#20251007 #인지행동치료 #수행


하루는 신경성 폭식증이 의심되는 환자가 내원했다. 처음에 나는 환자에게 폭식하게 될 때의 상황, 생각, 행동 등을 적어보자고 했다. 인지행동치료(Cognitive-behavioral therapy)의 시도였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지를 인식해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자기 상태가 어떤지 모르면 바꿀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면담에서 환자에게 그것들을 적어봤냐고 물어보니, 못했다고 했다. 그 과정을 들여다보는 게 힘들었고 더 괴로웠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 CBT는 포기했다. CBT가 안 되면 원인을 찾아보는 정신치료(Psychotherapy)는 어떨까? 환자에게 정신치료는 어떨지 물어보자, 환자는 딱히 원인은 알고 싶지 않고, 그냥 먹고 토하는 이 현상만 해결하고 싶다고 했다. 환자가 원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일단 항우울제를 조절하면서 경과 관찰 하기로 했다.


약을 점차 증량했지만, 환자는 계속해서 폭식하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환자가 별로 달라지는 게 없는 것 같다고 하니 조바심이 났다. 그렇다고 인지행동치료를 하자니 환자는 현 상태를 들여다보는 걸 어려워했고, 또 정신치료로 원인을 찾자니 그것도 어려워했다. 내가 환자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약 주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나 싶었다.


환자가 뭐라도 방법을 좀 찾아갔으면 좋겠다 싶었다. 면담 시간은 길어지고, 고민도 길어지던 차에 문득 한 생각이 스쳤다. ‘굳이 지금 상태를 잘 알아야 할까?’ ‘지금 상태를 잘 알지 못해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환자에게 첫 번째 면담에서 언급했던 ‘다 먹지 말고 마지막 한 숟갈 남기기’에 관해서 물어봤다. 환자는 그건 어느 정도 하고 있다고 했다. 옳다구나! 그러면 이번에는 마지막 두 숟갈을 남겨보기로 했다. 그리고 급식을 퍼담을 때도 마지막 한 숟갈을 덜 담아보기로, 토도 마지막 한 번을 참아보기로 했다. 환자에게 뭔가 방법을 알려주고 나자 나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다음 외래에서 환자는 앞서 공유했던 방법을 시도해보고 있다고 했다. 다행히도 음식을 조절하고 남기는 횟수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나는 여태까지, 지금의 내가 어떤지 알아야만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적어도 바뀌려고 (생각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은, 지금 자신의 상태가 정확하게 어떤지는 몰라도, 그냥 ‘지금 여기’에서부터 바뀔 수 있는 거였다. 물론 기준이 없으니 얼마나 바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변할 수는 있다.


수행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내가 전생에 무슨 업(業)을 어떻게 얼마나 지었고, 다른 사람들과의 인연(因緣)이 어떻게 되고, 그래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방향은 확실하지 않은가.


부처님은 화살의 비유*를 하셨다. 화살을 누가 쐈는지, 화살의 모양이 어떤지, 색깔이 어떤지, 누가 만들었는지, 활이 어떤 모양인지, 어떤 색깔인지 모르지만, 어쨌건 화살은 뽑고 치료하고 봐야 한다. 죽어가고 있는데 저런 질문들이 도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마찬가지로 도대체 나는 왜 태어났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또 우주는 어떻게 생기고 하는 문제들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어쨌거나 나는 존재하고, 또 살아있다. ‘나’라는 현상이 이미 드러나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어떻게 흘러왔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당장 지금부터라도 나만을 위하는 마음을 뒤집어서 상대를 위하는 마음으로, 더 넓게 마음을 쓰도록 노력해야 한다.



*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중아함경 권제60, 전유경(箭喩經) 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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