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이 다르다

epoché 와 下心

by 초이

#20260225 #epoché #에포케 #下心 #하심


J는 만삭 사진을 별로 찍고 싶어 하지 않았다. 변한 몸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나는 임부라면 살이 찌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내 몸이 아니라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건지. J는 아침마다 공복에 몸무게를 재고는 숫자가 올라가는 것에 일일이 반응했다. 본 적 없던, 그리고 내 몸무게를 따라잡는 숫자에 적잖이 놀랐다.


J는 KBS 휴먼다큐 <인간극장> 보는 것을 좋아한다. 최근 <인간극장>에는 19년 만의 첫아기를 낳은 부부가 나왔다. 50여 차례의 시험관, 그간 유산도 여러 번 겪고, 엄마는 몸도 많이 상하고, 엄마 아빠의 마음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 엄마는 임신하고 너무 좋아서 만삭(滿朔)도 아니고 배도 별로 안 나왔는데 만삭 사진을 찍으러 갔다고 했다. 누구는 쉽게 고민하는 것이 누구에게는 절실한 바람이 될 수 있다는 게.


또 하나의 일화. 길을 걸어가던 중에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건너오고 있었는데, 그 앞으로 차가 쌩하니 지나갔다. 건너면서 얼핏 들었는데, 무리 중 한 아줌마가 “사람이 먼저 아니야?” 이랬다. 나는 속으로 ‘걸을 때는 사람이 먼저고, 운전할 때는 차가 먼저지요’ 했다.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고, 같은 사람도 그때그때 입장이 다르다. 각자 처한 상황도 다르고, 받아들이는 것도, 드러내는 것도 다르다. 그러니 한순간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조금은 여유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




서양 철학에는 에포케(epoché)*라는 개념이 있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Edmund Husserl(에드문트 후설)의 개념인데, 고대 그리스어로 ‘정지, 중지’ 등의 뜻이라고 한다. 내가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건 내 주관 안에서 객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객관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


불교에는 하심(下心)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마음 안의 무언가와 현실의 무언가가 부딪혀서 내 생각, 말,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걸 일단 참고 내려놓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드는 마음은 대개 나를 위한 것들일 텐데(‘나’를 생각하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그렇게 살아오면서 습(習)이 배였을 테니), 그걸 내려놓는 것. 가능하다면 그 마음을 다른 사람을 위한 마음으로 바꾸는 것.


각각의 인식으로 각각의 세상에서 살지만 한데 모여서 살 수밖에 없는 이곳. 몇 년 전만 해도 메타버스니, 뭐니 하면서 개개인이 고립되어 살 것 같았지만, 결국은 다시 또 어울려 지낸다. 무리 지어서 산다는 뜻이기도 한 ‘중생(衆生)’, 중생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모쪼록 다른 사람하고 어울려 지내면서 모나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다산초당(2019), 29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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