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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Feb 02. 2021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의 의미

성장 vs 안주

#20210127 #성장 #안주


 오늘도 지치는 하루다. 지치는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정말이지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다가도, 위로받기 위해서 누군가를 만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지금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누군가를 만나고는 싶다. 하지만 외로움을 채우려고 만나고 싶진 않다. 누군가를 만난다면, 정말로 좋아하는 누구였으면 좋겠다. 외롭다고 아무나 만나면, 나도 '아무나'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나는 '아무나'가 되고 싶지 않다.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주워 먹지 않는 것처럼, 아무나 만나지 않음으로써 나는 어떤 ‘급’이 있는 사람이라고, 되지도 않는 자존심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아직 누굴 만날 때가 아닌 거 같다. 누굴 만나면 ‘어딘가에 멈춘다’, ‘안주한다’라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공부하면 더 좋은 점수를 받았던 학생 때처럼, 노력하면 더 좋은 누군가를 만나리라고 믿는 걸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성적순이 아닌데도? 그렇다고 더 좋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아니면서. 무엇을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누군가를 만나는 게 내게 ‘성장(成長)이냐, 안주(安住)냐’의 문제라면, 내가 어떤 것을 성장’, ‘안주라고 생각하는지 알아야 한다. 나는 원하는 방향으로의 성장이 아닌 것을 안주라고 여겨왔는데, 그럼 어떤 게 내가 원하는 성장이었나? 돌이켜보면 나는 내 옆에 있는 사람보다 내 성적, 내 공부가 더 중요했다. 성적, 등수가 중요한 삶을 살아왔다. 늘 누군가와 경쟁했으니까. 학교 내신, 수능, 국시까지. 자연스레 나의 성장은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었다. 그때의 나에게는 그게 옳았다.


 그렇지만 사회에 나오니 달랐다. 학교에서는 성적으로 학생들을 줄 세울 수 있었지만, 사회에서는 보는 시선이 너무 다양해서 그럴 수 없었다. 일은 특출 나게 잘하거나/못하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았다. 사회에서 주로 보는 건 결국 ‘다른 사람과의 관계’였다. 같이 일하는데 마찰이 잦을 사람은 꺼리기 쉬웠다. 아주 뛰어나지 않은 이상, 사회에서는 나 혼자 잘난 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런 걸 알아가면서 내가 점점 다르게 생각하게 된 거 같다. (나 아닌 사람에게 잘하는 게 내 성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게 아닌지)


 요컨대, 학교에서는 성적, 등수로 남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지만(혼자 인정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더 큰 사회에서는 일일이 시험 칠 수도 없고, 눈에 띄게 일을 잘하거나/못하지 않는 이상, 결국 ‘사람’이 어떤지를 봤다. 그래서 예전에는 시험을 잘 치기 위했던 내가, 이제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게 아닐까? 나의 ‘더 나은 사람’의 기준이 ‘시험 잘 치는 사람’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고,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뀐 게 아닐까? 그러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애인에게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아닐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잘 못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전에는 누군가를 만남과 동시에 스스로의 성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을 위해 내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들이는 게 나의 성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것이 더 중요했다. 지금의 나는 상대와 부딪히면서 내 마음의 기준(; 내 마음에서 걸리는 부분)을 찾고, 그걸 없애는 과정이 ‘수행’이자, 나의 ‘성장’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앞으로의 내 삶에 경쟁이 더 있을지 모르겠다. 근데 실은 삶 자체가 경쟁이 아니던가? 회사에 들어가면 상사의 눈에 더 잘 띄고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을까? 그러면 그때는 어떡하지? 그때마다 일이 중요하다면서 사랑을 미룰 수도 없는데 말이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 회사에서 맡은 일을 성실히 해내는 것. 그건 누가 대신해 줄 수 없고, 양보할 수도 없는 나의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하고 지내는 것, 도덕적인 부분 등은 일과 관련이 없고, 경쟁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다. 그건 그냥 사람의 됨됨이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길 바라는가? 일, 공부 등 자기가 해야 하는 일에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길 원하는 걸까? 아니면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다니는 절에서 어떤 어른에게, 학문의 바퀴와 법의 바퀴를 같이 굴려보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고, 의대 공부와 불법 공부를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법의 바퀴는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해야 할 공부를 성실히 하는 것. 그래서 맡은 바의 역할을 잘하는 것(ex. 환자를 잘 보는 것). 그게 내가 할 일을 잘하고, 주변에 잘하면서 불법을 공부하는 방법이었다. 해야 할 일과 불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주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이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기억하고, 하는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집중해주는 것. 상대방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움직이는 것. 그걸 꾸준히 하면 그게 결국 수행이었다. 거기에 육바라밀(六波羅蜜)이 다 녹아들 수 있다. 그걸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의 문제였다.




 실은 나는 둘 다 잘했으면 좋겠다. 일도 잘하고, 주변 사람에게 좋은 사람도 되고 싶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 둘은 양립할 수 없고, 서로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하는 부분인 거 같다. 결국 내게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의 의미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 외로, 다른 부분(ex. 나의 됨됨이, 인간성 등)으로의 성장 기회가 되겠다. 그렇다고 성장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을 위해서 내 마음을 고치다 보면 자연스레 성장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 같다. 때가 되면 좋은 인연이 다가오겠지. 나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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