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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Oct 10. 2021

성장 중독(成長 中毒)

나는 성장 중독인가?

#20211010 #성장 #중독 


 J와 얘기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장 중독(成長 中毒)인가?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갇혀있나? 지금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병이 아닐까? 뭐든 지나치면 병인데, 나는 성장 중독인 거 같다. 그리고 그건 항상 누군가와의 비교(타인을 비롯해, 과거의 자기 자신까지도)를 동반하기 때문에, 늘 피곤한 삶이 아닐 수 없다. 남과 비교하거나 내게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끝이 없는데. P는 누군가와 함께한다면 분명 둘 중 하나는 덜 발전적인 사람이 있을 거고, 서로 괴롭지 않겠냐고 그랬는데, 맞는 말이지. 


 성장 중독이라고 단순히 성장을 지양해야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장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 되지 않나 싶은 거다. 뭐가 성장인지도 불명확한데, 성장하겠다고 이리저리 부딪히는 건 그냥 지금 상태에 대한 불만족의 발로(發露) 아닌가. 


 근데, 뭐가 성장인지 불명확하다면 거꾸로 말하면 뭐든 성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안 되나? 그저 나는 내가 정체되어 있는 게 싫다. 몰라도 괜찮다는 반지성주의(反知性主意)도 싫고, 「~해도 괜찮아」라는 식의 어설픈 위로들도 싫다. 그런 건 정말 너무 힘들 때 찾는 일시적인 위안일 뿐이다. 나는 말 그대로 어느 방향으로든 나아졌으면 좋겠다여태 그렇게 살아와서 그런지 몰라도 공부해서 지식을 쌓는 식의 성장이 제일 익숙하지만, 그거 말고도 돈을 많이 벌든, 시험을 통과하든, 무언가를 배우든, 새로운 경험을 해서 나를 좀 더 알든 그런 것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면 불안하고뭐라도 붙잡고 있어야 하고마음에 항상 편치 않은 상태인 걸 보면 병은 병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의 의미>에도 적었지만, 당시의 나는 ‘일’과 ‘사람’의 성장은 양립할 수 없고, 서로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지금의 내게 주어진 질문은 두 가지 삶의 태도, ‘현재에 만족 vs 성장하려고 노력’이 아닐까 싶다. 저 글에서의 나는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전제로, 어떤 성장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으니, 어쨌거나 나는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쪽인가 보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성격인지도 모르겠다. 이건 삶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이지, 이렇게 살지 않는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이쪽이 보기에 저쪽은 매우 피곤한 삶일 거고, 또 저쪽에서 이쪽을 보면 저렇게 살아도 되나 싶겠지. 그러나 둘 다 각자 인생을 그렇게 탈 없이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내가 성장에 집착하는 것은 나의 못남을 가리고, 나는 성장하고 있다고 자위(自慰)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도 못난 내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나는 성장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봐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씁쓸해졌다. 실은 의사가 되고 전문의가 되는 것은 레일 위의 기차와 다를 게 없어서, 주어진 시간들을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건데. 사람들은 나더러 의사라고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정작 스스로 ‘그거 말고는 뭘 했지?’ 생각하면 이룬 게 없다는 생각에 우울해지곤 한다. 어쩌면 나는 입으로만 성장을 떠드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원래 모든 것은 (눈에 띄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시시각각 달라지게 되어있는데, 내가 그 성장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의 성장이 아니었기에 성장하고 있다고 보지 않았을 수도 있지. 어쨌거나 내 인식이 낮은 탓이다. 하지만 현재에 만족하느냐/성장을 추구하느냐는 큰 차이인 것 같다. 바닷가재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면 새로운 껍질을 만들지 않는 것처럼*, 현 상태에 만족하는 사람은 성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또, 변하려고 생각하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천지 차이지. 나는 항상 새벽 4시 40분에 일어나 운동도 하고 10시간 넘게 공부하는 S를 보면서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운이 좋아서 정신과 전문의를 목전에 두고 있지만,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가 단순히 그걸 누리기 위해서 온 것만은 아닐 거라고 믿고 있다. 어떤 인연으로든 이번 생은 이렇게 좋은(?) 직업을 갖게 되었지만, 이 직업도 올바르게 써서 환자들을 잘 치료하고, 한 인간으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걸 잘 찾아서 해주고. 모쪼록 인연이 닿는 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도 생각에만 그칠 게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데. 


 법화경의 일곱 가지 비유(법화칠유, 法華七喩) 중에 약초유품(藥草喩品), 약초의 비유가 있다. 중생을 초목에, 부처님의 자비를 대상을 분별하지 않고 내리는 빗물에 비유해서, 부처님의 법비가 모든 중생에게 고르게 내려도, 저마다의 근기나 인식의 차이로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다는 의미**이지만, 꼭 부처님의 자비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에게 주어진 대략 80년이란 시간을 넣어도 얼추 의미가 비슷하지 않나 싶다. 똑같은 시간을 보내도 천차만별의 차이가 생긴다. 애초에 똑같은 시간을 보내지도 않지만, 주어진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들을 저마다의 인식으로 받아들이고, 또 살아간다.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어떤 인식으로 사는가의 차이가 그렇게 갈라진다. 


 불교는 권력, 학력, 미력, 재력, 체력 등을 가질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가지라고 하면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니 참 어렵다. 자칫 잘못하면 ‘나는 원래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 하고 자위(自慰)하는 꼴밖에 되지 않지 않나?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그조차 하나의 현상(現象)에 지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배웠고, 머리로는 그렇게 받아들이라고 하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에는 참 어려운 것 같다. 



Reference

* Youtube, [Learning Life from a Lobster] 

  (https://www.youtube.com/watch?v=n6lqjBeKq-Q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법화칠유(法華七喩)”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8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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