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현화의 벽을 느끼다
#20220103
공기가 차다. 손이 시리다.
마음도 같이 시려진다.
시험을 준비하는 나날은 효능감을 느낄 새 없이 흘러간다.
못다 한 공부에 생각이 많아지고, 하기 싫은 마음도 늘어간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공부는 안 하고,
괴로운 마음을 피하려 SNS 새로고침이나 하고 있다.
잠만 조절해도 삶이 흐트러지지 않을진대,
못다 한 공부가 마음에 걸려 잠드는 시간도 늦어진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는 건 또 아니다.
해야 할 일을 다음날로 과감히 미루는 것도 용기다.
다음날을 위해 과감히 잠드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
내 방어기제는 ‘시험공부’였고, 여전히 그러하지만
여전히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시험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그 시간을 다 시험공부에 쏟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보낼 수는 없는 걸까?
놀 땐 놀고, 쉴 땐 쉴 수 없는 걸까?
내 시간을 가져가는 그대에게 괜히 짜증을 내고, 또 미안해진다.
짜증 나는 마음에, 미안한 마음에 내 마음은 더 괴롭다.
아낌없이 주는 그대에게 나는 뭘 더 바라고 있나?
나는 또 그대의 무엇을 탓하고 있나?
어디까지가 건강한 ‘탓’인 걸까?
어디까지가 나의 탓이고, 어디까지가 그대의 탓일까?
애초에 탓이란 게 있기는 한 걸까?
그저 내가 오롯이 감당할 그릇이 못 되는 게 아닐까?
세상사 다 내 탓을 하면 내 것이 되고,
네 탓을 하면 내 것이 안 되는데,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대 탓을 하면 비겁한 거잖아.
그저 내가 조금 놓으면 되는 건데.
잠들지 못하고 밤을 새우고서야 결심했다.
운동을 하자. 잠이라도 잘 자자.
시험은 어떻게든 되겠지.
내 인생에 숱한 시험이 있었던 거 같은데,
시험 핑계를 대는 것도, 괴로운 것도 늘 새롭다.
종이로 치는 시험은 마지막이겠지만,
사람으로서 겪어야 할 시험은 아직 수두룩하다.
그저 그때마다 내가 이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버지와 통화하고 나서야 아차 싶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잘하든 못하든 주어진 시간을 성실히 보내면 되는 것을
괜히 끌어안고 괴로워하고 있었구나.
부디 조급해하지 말자.
분명 끝나는 날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