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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Jan 15. 2022

0. 다분히 불교적인 이야기

염념보리(念念菩提) 사사불공(事事佛供) 처처도량(處處道場) 

#20220113 #일체유심조 


 부처님의 눈에는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우리에게는 실재(實在)하는 이 세상을 깨달으신 분은 허깨비라고 하시니. ‘실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언뜻 이해가 되지만, 과연 그 의미가 전부일까? 화학 시간에 원자가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고, 전자가 원자핵 주위에 ‘구름처럼’ 존재한다고 배운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원자에서 핵과 전자를 빼면 나머지는 빈 공간인데, 그런 원자들이 모여서 컴퓨터도 되고, 사람도 되고, 나무도 되고, 물도 되니까 그렇게 ‘비어있다’는 의미인 걸까? 그럼에도 핵과 전자는 실재하니까 세상은 실재하는 게 아닌가? 

'빌 공(空)'이니까 '비어있다'의 의미??


 반야심경에도 색(色)이 공(空)이고, 공이 색이며, (색을 뺀 나머지 오온(五蘊)인) 수상행식(受想行識) 또한 마찬가지[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라고 되어있다. 색이 어떻게 공하며, 공한 것이 어떻게 색이 되는가?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뿐인 건가? 그런 거라면 색즉시공은 이해가 되는 듯하지만, 공즉시색은 여전히 의미가 와닿지 않는다. 없는 게 어떻게 있는 거지? 


 우주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주의 법칙 중 하나인 연기법(緣起法; 인연(因緣); 인과(因果))에 의해 이뤄져 있다. <매트릭스>에도 적었지만 네오에게 매트릭스 내의 모든 것이 코드로 보이듯, 우주를 벗어나 해탈하신 분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의(동물, 식물, 사람, 물건 등등의 모든) 인연이 훤히 보이시는 게 아닐까? 근데 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지? 물론 우리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밝지 못하기(無明)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진리의 편린(片鱗)이, 온 우주가 말하고 있는 무언가가 얼핏얼핏 보일 수 있다. 누구나 진리의 자리에서 나왔으며, 그렇기에 불성(佛性)을 영혼 어딘가에 지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오에게 매트릭스 세상이 이렇게 보이듯, 깨달으신 분에게는 우리의 세상이... 




 하여 이 매거진을 만들었다. 생활하면서 언뜻언뜻 보이는(보이는 것 같은), 내 멋대로 받아들이는 세상의 진리에 대해서 적어볼 참이다. 기존에 썼던 글 중에서도 불교와 다분히 관련 있다고 생각되면 여기로 옮겨놓을 생각이다. 별것 아닌 일들을 너무 깊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하나의 방어기제로서,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정신 승리’하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독자분들이 보시기에 때로는 억지일 수도 있고, 때로는 그럴 법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세상사 다 각자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받아들이기 나름 아니겠는가? 일어난 일은 바뀌지 않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마음은 바꿀 수 있으니, 그 마음을 더 좋은 방향으로, 깨닫는 방향으로 잡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산스크리트어 '옴'의 각 획에도 뜻이 있었다. 글자 하나에 깨달음을 향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니! 


 어차피 의미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인(因)을 지어놓았으니 연(緣)이 닿아 일어나는 거겠지. 그 일을 깨달음의 한 조각으로 잇느냐 마느냐는 당사자에게 달려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일로 어떻게 마음을 먹는 게 자신에게 좋은 방향일지 고민하지, 닥친 상황 자체에 집착하거나 매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수행하는 사람은 생각 하나하나를 보리(깨달음)로 잇도록(염념보리(念念菩提)), 가는 곳곳이 마음을 닦는 도량이 되도록(처처도량(處處道場)), 행동 하나하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하도록(사사불공(事事佛供))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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