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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Aug 03. 2022

'나'에 관하여

아상(我相)과 교만(驕慢), 하심(下心) 

#20220803 #아상 #교만 #하심 #불교 (자존에 관해 생각하던 중)


 ‘나’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와 부딪히는 상황이 있어야 드러난다. ‘나’는 상황에서 드러나는 나의 집합체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전자(電子) 같다. 평소에는 원자핵 주위에서 구름처럼 존재하다가, 관찰될 때만 모습을 드러내고 또 어디에서 발견될지 모르는 전자.* 근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고 특정 영역에서만 관찰되는 전자. 아니면, 원자핵에 묶여 있다는 자체가 이미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일지도? (사람을 많이 만나봐야 누가 나한테 맞는 사람인지 안다는 말도, 상대와 부딪히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라는 의미니까. 많은 경험을 해보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겠고) 원래라면 ‘나’도 현상이 일어났을 때 드러나고 그대로 사라져야 하는데, 족적이 남고 쌓여 거기에 매이게 된다. (→ 습(習)? 업(業)?) 


 부딪혀야만 나타나는 ‘나’는 허상이다. 실은 ‘나’라고 할 게 없다. 어제의 내가 그랬다고 해서 오늘의 나도 그렇게 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전과 비슷한 행동을 할 가능성은 높겠지만,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좀 더 익숙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선택을 좋아하기에, 그게 덜 불안하기에 그런 선택을 할 따름이다. 아들러 심리학이 ‘용기의 심리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러한 반복되는 패턴을 깨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란 것은 상황이 일어나는(혹은 스스로를 관측하는순간에 라고 고집(주장)하는 최소한의 것혹은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최소한의 것이자 나를 한계 짓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변하기에 고집할 것이 아니지만, 중생이니까 고집하는 거다. 자기 몸이, 자기 영혼이 자신인 줄 알고 사는, 자기 자신조차 버리고 고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게 ‘나’라면서 그게 영원하고 아주 중요한 것처럼 소중히 다루고 고집한다. 자기 몸과 영혼이 자기가 아니란 걸 아는 사람도,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괴롭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 (→ 아상(我相)?) 


 어디까지 고집할 것이냐? 그건 본인의 역량에 달렸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데까지 내려놓고 고집하는 거다. 상대와 부딪힌다는 건 상대와 내가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건데, 자신이 고집하는 걸 내려놓느냐 마느냐는 본인의 결정에 달렸고,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근데 또 ‘내가 한 번 봐준다’, ‘내가 참는다’라고 생각하는 건, 어쨌거나 계속 마음에 걸린다는 방증(傍證)이기에 아직 놓지 못한 거다. 아예 신경이 써지지 않아야 진정으로 놓은 게 아닐까? 


 중생은 천차만별이니 각자의 ‘최소한’이 다를 거고, 포기할 수 있는 부분도 다 달라서 부딪힐 수밖에 없다. 애초에 부처님께서 이 세상은 차별지(差別地)라 하셨으니! 최소한이 되지 않고 다른 마음이 더 붙으면 자만(自慢), 교만(驕慢)이고, 하심(下心)은 자만을 버리고 더 나아가 아상까지 버려가는 과정이 아닌지?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괴로운 이유는 자꾸 자기한테서 원인을 찾기 때문이다. 그동안에는 별생각 없었거나, 지내는 데에 특별히 걸리적거리지 않았거나, ‘나’라고 생각했던 것의 일부를 부정해야 하기에 괴로운 것이다. 그리고 ‘나’였으면 하는, 내가 바라는 모습이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괴로운 거다. 근데 실은, ‘나’라는 게 허상이라면 이런 고민들이 다 쓸데없다. ‘내’가 허상인데 예쁘고 못생겼고 잘나고 못났고 할 게 뭐가 있나? 그냥 묵묵히 하는 거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연연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그러면 나도 텅 비고, 과정도 텅 비고, 결과도 텅 빈다. 그렇게 텅 빈 마음으로, 무심(無心)으로 하는 거다. 

김연아: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박은빈: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해내야죠! 


 ‘나’가 허상인데 왜 좋은 마음을 내고 주변에 잘해야 하고, 잘나져야 하는가? 나쁜 마음이 아니라 좋은 마음을 내고 주변에 잘해야 하는 이유는, 우선 우리는 중생이니까 마음을 쓰면 쓴 대로 자국이 남는다. (습(習)?) 그리고 그 결과도 남는다. (업(業)?) 그러니 이왕 남는 거 좋게 남겨 놔야 한다. 그리고 내가 잘나져야 하는 이유는, 모든 것이 공(空)한데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과 비슷하다. 내가 힘이 있고 잘나야 덜 괴롭고, 또 힘이 있는 만큼 남을 도울 기회가 생기고, 그러면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주변 환경도 평안해지고, 궁극적으로는 해탈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몽중대작불사, 만다라, 공즉시색) 




 불이 없는 곳에서 자취하다가 대략 5개월 만에 라면을 끓이니 내가 이렇게 라면을 잘 끓였다는 걸 다시 알았다. 맛있게 먹고 나서 설거지도 하니 내가 이렇게 깔끔하게 설거지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다시 알았다. 뿌듯하고 또 기분이 좋았다. 이런 게 자존인가 싶었다. 근데 여기서 팩트만 남기면 ‘내가 라면을 끓였다’, ‘내가 설거지를 했다’이고, 뿌듯하고 좋은 감정은 그냥 부가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평소 가족끼리 식사하면 어머니, 아버지께서 설거지를 하시는데, 설거지할 때 두 분 마음에 ‘내’가 가족들을 위해서 설거지한다는 마음이 있을까? 감히 생각건대 그런 마음 없이 그냥 하시는 거다. 


 최소한의 팩트만 따져서 보는 것은 ‘나’를 볼 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다른 감정을 배제하고, 드러난 사실만 보는 것. 텅 빈 마음으로 보는 것. 결국 1)현재를 2)비(非)판단적으로 보는 마음챙김(mindfulness)이 그것이다. 



*불확정성 원리, 하이젠베르크의 현미경 

https://ko.wikipedia.org/wiki/%EB%B6%88%ED%99%95%EC%A0%95%EC%84%B1_%EC%9B%90%EB%A6%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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