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상(我相)과 삼륜공(三輪空), 무심(無心)
#20220727 #아상 #삼륜공 #무심
그 친구를 3번째로 봤을 때였다. 처음은 신병 정밀검사에서 불안하다고 와서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를 쥐어서 보냈고, 두 번째도 불안하다고 왔는데 약은 안 먹었으며, 비약물적인 치료로 증상을 조절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 친구가 입대와 군대의 강압적인 분위기 등으로 인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잘 안 쉬어지는 등의 공황 증상이 계속 있는 것으로 판단해서 약을 처방했던 거였는데, 안 먹고 왔다니 일단 화가 불쑥 났다. 그러나 이유라도 들어보자는 생각에 화를 누르고 다시 물어보니, 신경안정제만 한 번 먹어봤는데 너무 까라져서 안 먹었다는 거다. ‘그래, 약에 한 번 데이면 먹기 싫을 수 있지.’ 그를 이해하려고 하면서, 다시 한번 “약이 증상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까라지는 약은 뺄 테니 그래도 안 먹을 거냐?”라고 물어봤다. 그래도 안 먹겠다기에, “그럼 나는 방법이 없다. 공황의 비약물적 치료를 공부해올 테니 다음에 다시 오라”라고 했다.
그 뒤로 교과서를 한 번 찾아보았으나 뾰족한 수는 없었다. Progressive relaxation 정도? 교과서에 나온 표를 캡처해놓고는 나중에 봐야겠다며 미뤄두었다.
그 친구는 오라는 시간에 안 오고, 두 번째 외래 이후 일주일 뒤에 왔다. 진료실에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계속 불안하니 외진을 가고 싶다.”라고 했다. ‘이건 또 무슨 외진 타령이지?’ 싶어서 왜 가고 싶냐고 물어보니, “밖에 나가서 '전문적인' 진료를 보고 싶다”라고 했다. ‘네 눈앞에 있는 나도 전문의란다’라는 생각에 또 화가 불쑥 났다. 올라오는 화를 꾹꾹 누르고는 “밖에 나가서도 선생님이 약 먹으라고 하면 어떡할래?” 하고 물어보니, 그래도 전문적인 진단을 받고 싶단다.
‘네가 날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지.’, ‘네가 그렇게 해서 마음이 편하다면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기본적인 정신상태 검사는 해야 하니까 물을 걸 다 묻고 외진 소견서를 써주는데, 그때까지도 무시당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분이 안 풀려서, 전문적인 진료라는 말에 큰따옴표까지 쳐서 써줬다. ‘다음에 오면 실컷 비꼬아줘야지’, ‘진료 안 보고 싶다’, ‘다음번에도 외진 보내고 싶다’ 이런 생각도 마구 들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그하 그그하. 그냥 그러려니 하자. 너도 끌려왔고 나도 끌려왔으니 피차 괴롭겠지. 그래. 차라리 나간다고 하니 내가 계속 진료 안 봐도 되고, 그게 낫지 뭐.
이게 다 내가 ‘전문의’라는 상(相)에 갇혀 있어서 무시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팩트는 이것들 뿐이다. ①훈련병의 불안, ②치료자인 나는 비약물적 치료 잘 모름, ③외진. 거기에 다른 감정들은 다 부가적인 것들에 불과했다. 내 자만도 부가적인 것이지. 여기에서 포인트는 그 친구의 불안 및 공황 증상을 낫게 하는 거였지, 내 자존심을 지키는 게 아니었는데.
자만(自慢)이었구나, 아상(我相)이었구나. 실은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진료하는 행위도 없는 것인데. 그저 그사이의 마음만이 남는 것인데 나는 또 한 번 마음을 못되게 써버렸구나. 괴로워하는 사람이 편안해지는 게 중요한 거고, 거기에 내가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면(직접 치료하든, 병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소개해주든) 그거에 만족하면 되는 거였는데 쓸데없는 마음까지 내었구나.
덕분에 내 자만을 알고, 진료에 삼륜공(三輪空)을 적용할 생각을 했으니 그거로 만족해야지. 실패에도 성공에도 매이지 말고 그냥 계속 부딪히는 것. 무심(無心)이 이런 경지일까 감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