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因緣)
#20230330 #인연
1. 며칠 전 일이다. 밤에 운전하는데, 시속 100km 구간 단속하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뒤차가 하이빔(상향등)을 켜고 가는 것이다. 구간 단속하는 곳이니까 차 순서가 바뀔 리도 없고, 계속 눈부시게 가겠다 싶어서 화가 났다. 속도를 낮춰서 그 차 뒤로 가서 내가 하이빔을 켰다. 하이빔은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가 가니까 끄라는 신호로 하이빔을 껐다 켰다 했는데 소용없었다. 1차선에서 나오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2차선으로 빠질 뿐이었다. 그 차는 트레일러트럭 뒤에서도 그렇게 가다가 트럭한테 하이빔으로 복수 당했다.
1-1. 진정으로 상대를 위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나는 상대의 하이빔에 내가 먼저 화가 났고, 그다음에 ‘다른 차들에게도 피해가 가니까 끄게 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내 마음에 먼저 걸리고, 그걸 상대를 위한다는 식으로 핑계? 합리화하는 게 아닐까? 마음에 걸림 없이 상대의 행동을 보려면, 상대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도대체 어떤 경지여야 할까?
2. 몇 달 전에 봤던 어떤 차는, 헤드라이트 말고 하이빔만 켜고 가기도 했다. 그러면 뒤에서는 안 보이고 앞에서만 보이는 반(半) 스텔스 차가 된다. 뒤에서는 브레이크등만 보인다. 자기는 앞이 보이겠지만, 앞사람은 눈이 부시고, 뒤에서는 보이지도 않으니 가히 빌런이라 할만하다. 이 차도 헤드라이트를 켜라고, 헤드라이트를 몇 번이나 껐다 켰다 했는데도 못 알아들었다.
2-1. 어떻게 해야 내가 생각한 바를 상대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이렇게 차에 갇혀서 표현 방법이 제한된 경우에는 특히나 말이다.
3. 나도 빌런이었던 적이 있다. 한쪽 헤드라이트가 나갔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너무 앞이 안 보였다. 그래서 간간이 하이빔을 켜고 길을 확인하면서 온 적이 있다. 나중에 보니 양쪽 헤드라이트가 다 나가 있었다. 나는 미등만 켜고 밤길 운전을 했던 거였다. 뒷모습만 보이고 앞모습이 보이지 않는, 전자(前者)와는 반대로 반(半) 스텔스 차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또 얼마나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까?
2-2. 헤드라이트랑 하이빔을 구분 못 할 정도면 운전해도 되나? 하는 생각에 화가 났다. 매너가 똥이네. (자매품은 깜빡이 안 켜고 끼어드는 사람) 아, 혹시 나처럼 헤드라이트가 다 나갔는데, 아무것도 안 켜면 다른 사람이 자기가 안 보이니까 그냥 욕먹기로 한 건가? 근데 그러면 안개등을 켜는 방법도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그 사람은 욕먹을 만한 일을 했고, 나는 욕을 했다. 하이빔인 걸 알았든 몰랐든, 그건 욕먹을 일이었다.
4. 요새는 차체(車體)가 높아서 그런지, 헤드라이트가 하이빔인 것처럼 눈부실 때가 있다. 화나는 게 맞나 싶다. 내 눈이 밑에 있는 걸 어쩌나 싶기도 하고. 다음 차는 SUV로 사야지 싶기도 하고. 차로 화를 낸데 봤자, 뒤에서 하이빔 몇 번 쏘는 게 다다. 앞에 있으면 복수할 방법도 없다. 급브레이크를 밟을 수도 없고. 화가 치밀어서 부글부글할 뿐이다.
5. 밤길을 운전하다 보면 저기 뒤에서 한 쌍의 빛이 쏜살같이 달려올 때가 있다. 혜성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뜨거운 만남이 되면 안 되기에 얼른 옆으로 길을 비켜준다.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스푸트니크의 연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 우리는 멋진 여행을 함께하고 있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멀리서 보면, 그것은 유성처럼 아름답게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수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거죠. 두 개의 위성이 그리는 궤도가 우연히 겹칠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고 어쩌면 마음을 풀어 합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잠깐의 일이고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 속에 있게 되는 거예요. ...
1년 동안 매 주말마다 진주-세종을 왔다 갔다 했는데, 한 번의 사고도 없었다. 내가 나름 조심스럽게(?) 운전한 덕도 있겠지만, 내가 다닌 그 길 위에서, 그 순간에 주변에 있던 차들도 같이 조심해줬기에 사고 없이 다닐 수 있었다. 간간이 하이빔 빌런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별문제 없이 잘 다녔다는 게 참 감사한 일이다. 앞으로 길에서 또 어떤 인연들을 만날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탈하게 지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