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어떻게 하든
#20230719 #내일 #내역할 #나나잘하자
내가 다니는 절의 특별 법회는 영상부원 4명이 듣기에 법회 준비도 4명이 했었다. 최근에 한 명이 더 듣기 시작해서 법회 준비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정기법회는 이 5명에다가 2명이 더 와서 나 하나 늦거나 없어도 법회 준비가 어렵지 않다. 그런 느슨한 마음에서였는지, 4월 정기법회에 가는 데에는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40분가량 늦어버렸다. 역시나 나 없이도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 2명이 더 오는 것과 내가 내 일 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2명이 더 오든 말든 나는 내 일을 하면 되는 건데. 마음이 글렀다 싶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2020년 초 나는 머리를 자르던 디자이너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미용실에 36만 원이라는 거금을 결제했다. 40만 원어치의 쿠폰을 36만 원에 해준다지 않나! 머리를 마음에 들게 잘 잘라줬던 디자이너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머리라곤 커트밖에 안 하는 내가 40만 원을 2년 안에 다 쓸 수는 없었다. 2년이라는 유효기간이 다 되어서 부랴부랴 J에게도 쓰게 했지만 8만 원 정도가 남았었다. 설상가상으로 내 머리를 잘라주던 디자이너는 퇴사했다. 결제했던 가게에 가니, 쿠폰을 소멸시키진 않을 테니 최대한 빨리 써달라고 했다.
돈을 냈지만 없는, 만기 된 쿠폰을 갖고 결제를 하려니 갈 때마다 눈치가 보였다. 퇴사한 디자이너를 대신해서 원장이 머리를 잘라주는데, 덩치도 크고 날카롭게 생긴 남자가 처음에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과할 정도로 공손하더니, 그 다음번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퉁명스러운 거라. 나는 ‘내가 뭘 잘못했나?’ 싶기도 하고, ‘내가 돈을 안 내는 손님이란 걸 알아서 그런가?’ 등등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저 사람은 디자이너로서의 본인의 일을, 나는 손님으로서의 나의 몫을 할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돈을 안 내서 내가 뭐라고 할 처지는 못 되니, 다른 직원에게 ‘혹시 내가 기분 나쁘게 한 게 있다면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라고 하고는 가게를 나왔다.
이런 일이 있고 나니, ‘그냥 4만 원 정도 날리는 셈 치고 더 가지 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부딪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돈 내라고 하면 내지, 뭐. 내가 행동을 잘못한 건 없잖아? 아, 만료된 쿠폰을 들이미는 게 잘못인가? 하지만 쓰게 해 준댔는데? 내 안에서도 갑론을박이 계속 일어났다.
제일 최근에 갔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예약하고 가서 기다렸는데, 예약도 없이 나보다 늦게 온 손님을 나한테 아무런 설명도 안 해주고 먼저 잘라주더라. 그래도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저 사람은 저 사람의, 나는 나의 역할을 할 따름이라고 자위하면서 그렇게 있었다. 원장은 여전히 퉁명스러웠고, 날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고, 가위가 아닌 전기이발기로만 대강 머리를 잘랐다. 그동안에 나는 ‘내가 돈을 안 내니까 이런 대접을 받는 건가?’ 하고 예민해져서 상대의 행동을 더 유심히 살폈다. 실은 내가 당당하지 못하니까 상대를 탓하는 투사였을 텐데. 나는 그 피해의식이 드러나지 않게 꽁꽁 싸매는 데 급급했다. 돈을 냈다면 내가 그런 취급을 받았을까? 그런 취급을 받고도 그렇게 가만히 있었을까? 나도 찝찝하니까 아무 말도 못 한 거 아닌가? 가게에서 만료된 쿠폰을 다 쓰게 해 주겠다고 했는데, 그때 돈을 내겠다고 하지 않은 게 잘못이었을까?
잔칫상을 잔뜩 차려놓고 아무도 안 먹으면 주인이 먹어야 하는 것처럼*, 내가 원인이 되어 더 악연을 짓지 않도록 일어나는 생각들을, 화를 참았다. 내가 더 수준이 높았다면 화를 내되 내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나는 내가 그 정도 수준이 안되고, 화를 낸 마음에 머무를 걸 알기에 참았다. 그리고 수준이 높았다면 화를 내기 전에 상대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이미 알았겠지. 순간적으로 화를 내면 일시적으로는 시원하지만 (이내 허탈해지고), 화를 낸 업(業)과 상대와의 악연(惡緣)과 내 안의 화내는 습(習)은 내가 풀고 없애기 전까지 영원히 나를 괴롭힌다고 이해하고 있다. 당장의 마음만 허탈하게 시원하고, 남는 건 내가 갚고 없앨 것들 뿐이다. 화를 내서 이득일 게 하나도 없었다.
화를 참은 다음은? 내 할 일을 해야지. 나는 내 코가 석 자라, 상대방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상대의 생각은 내가 알 수도 없고, 설령 말해준 대도 내가 믿지 못하면 땡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알 수 있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내 몸과 입과 마음뿐이다. (‘나나 잘하자’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것들을 잘 다스려서 지혜가 열리면 상대의 마음도 보이겠지. 그런 다음에야 내가 상대를 위해서 어떻게 할지도 알게 되겠다. 그전까진 난 내가 할 일을, 내 역할을 다할 뿐이다.
* 불교신문, [불교를 빛낸 장자 이야기] <35> – 부처님을 증오했던 바라도사와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