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 다시 쓰는 서문(序文)
#20230716 #여시아문 #여시아식
불교에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단어가 있다. 직역하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이다. 불교 초기에는 법문이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되었다고 한다. 법문을 들은 사람이 다음 사람에게 법을 전할 때, 자신의 인식으로는 이렇게 받아들였으니, 혹여 오해하지 말라는 당부 내지는 겸손이 담긴 단어라고 생각했다.
정신세계사에서 나온 『티벳 사자의 서』의 앞 절반은 서문과 해설이다. 본문은 오히려 간결하다. 본문에도 주석(注釋)이 작은 글씨로 더 길다. 서문과 해설, 번역자들이 자신이 이러한 배경, 인식으로 글을 적었으니 글을 읽을 때 오해하지 말라고 적어두었다. 마치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라고 말해주는 듯했다(견월망지 見月望指). 그런 점을 미리 밝히고 글을 읽게 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일상생활을 받아들이는 나는 어떠한가? 내 생활은 단지 ‘듣기’만 하지 않는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는 5개의 감각기관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생각한다. 즉, 육식(六識)이 있다. 식(識)이라는 단어가 받아들이는 과정과 받아들인 결과의 총칭이라면, ‘내가 이렇게 보고 듣고 느꼈다’라는 것은 ‘여시아식(如是我識)’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다른 사람의 인식이 아닌 내 인식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으니까. ‘내 인식으로는 그 일을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나의 인식으로 본 것일 뿐입니다.’ 카메라로 촬영하거나, 녹음하지 않는 이상, 엄밀한 의미의 객관적인 시선은 존재할 수 없지 않나 싶다.
일상을 하나하나 녹화하거나 녹음할 수는 없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매우 피곤할 것이다. 나는 내 인식으로만 내 일상을 받아들이고 느낄 수밖에 없다. 하여 만든 것이 이 매거진이다. 내가 경험한 일 중에 마음에 남는 일을 되새기고, 내 마음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이 주로 걸리는 점은 어떤 것인지, 버릴 것은 무엇인지 찾아볼 참이다. 왜 버려야 하냐고? 버려야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무척 사소한 일도, 무척 사적인 일도 있을 거다. 그래서 발행되지 못하는 글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좋다. 중요한 건 되새기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작업이기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하는 이 작업을 보고 누구라도 이러한 길이 있음을 알고, 혹은 나보다 더 발전된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넓힐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할 수 있는 일을 할 따름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마음에 걸리는 걸 하나씩 버려 좀 더 마음이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