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낳으면서 뇌도 같이 낳았냐는 말

자꾸 멍청해지는 저도 제가 싫습니다만

by 편은지 피디
애 낳으면서 혹시 뇌도 같이 낳은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자꾸 깜빡깜빡해?


내가 직접 들은 말은 아니고, 친한 여자 피디 선배가 남자부장님으로부터 출산 직후 직접 들은 말을 전해준 말이다. 문장으로 봐도 자극적인 이 무용담(?)을 난 하필 긴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하는 첫날 들었다.




"애를 낳았더니 자꾸 깜빡깜빡해요."

이런 얘기는 직접 하기에도 듣기에도 너무도 상투적인 말이라고(=나는 다를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주말 아이와 함께 간 얼음썰매장에서 '아,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조금은 서글픈 수긍이 갔다.


뭔가 때로는 과대포장 되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간소화되고 미화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한 알다가도 모를 육아.

육아라는 이 행위는 지나치게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미끄러운 얼음 위에서 "엄마가 끌어줘~"를 반복하는 유아를 위해, 충실한 썰매견이 되어 약 두 시간을 같은 구간을 왔다 갔다 하는 행위. (이 와중에 내 모든 체중을 실어서 5회 넘어지며 타박상도 획득.)


이렇게 썰매를 끌어대며 스마트한 휴먼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스마트해 보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엔 운동신경 없이 또 넘어질까 벌벌대는 '소' 정도로 보이려나.


소처럼 썰매를 끌며 나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도 책 한자를 읽을 수도 없다.

오디오 북이라도 들을 수 없냐고? 종달새처럼 계속 나한테 말을 걸고, 본인 말을 한 마디라도 못 알아들으면 화를 내는 아이 앞에서 오디오북은 사치다.


그래도 키즈카페가 좋은 게 비교적 내 가시권 안에 아이를 풀어놓고(?) 나는 커피도 마시고 책이라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북리뷰 같은 건 놀이터나 키즈카페에서 많이 썼다. 그러나 이것도 운 좋을 때의 얘기고 "엄마 이리 와서 이거 봐봐."라거나 "여긴 재미없어."등의 부적응을 보일 경우에는 엄마가 초밀착 마크를 해야 하므로 내 자유시간은 없다.


그 외에 주요 육아 업무 중 하나인, 밥 먹이기.

한 입 넣어주고 먹을 때까지 아이의 입이나 밥그릇만 보며 하염없이 멍하게 기다린다. 잘 먹지 않는 경우가 90%이고 당연히 화가 난다. "야 먹지 마! 그만 먹어!"라고 한 마디하고 다 치우고 싶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다. 밥 먹이는 게 뭐 대단하냐 싶지만, 엄마로서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자 의식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육아휴직 때도 군대처럼 아침에 이유식을 정확한 비율에 맞춰서 만들고, 200ml씩 네모난 그릇에 칼 같이 소분해서 넣어놓으면 그게 꼭 그날 하루 내가 달성해야 할 의무 큐브 같았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이 큐브 먹이기 하나 달성을 못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 없고, 그걸 아이한테 화풀이한 적도 여러 번이다.


반대로 그 큐브를 남김없이 먹어주면 오늘 내 할 일을 해냈다 or 오늘 하루는 헛되지 않았다는 성취감이 들었다. 사실 이거 말고는 성취감을 느낄 게 없다.


목욕시키기? 재우기? 이 행위 역시 단순 반복이라 인간의 고등적 사고가 들어갈 틈이 없다. 초반에는 아이가 잘 때 은희경 책도 읽고 했는데, 나중에는 나도 체력이 소진되어 주로 같이 자거나 혹시라도 애가 깰까 봐 다른 방에 들어가서 숨죽여 이유식 재료를 믹서기에 갈면서 '나 지금 뭐 하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런 단순한 행동과 생각을 몇 년 넘게 지속적으로 반복하다 보니, 우둔해져 버린 나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추운 날 추운 줄도 모르고 왕복하는 썰매견이 된 나 자신을 보고 선배가 들었던 저 문장이 떠올랐다.

뇌를 낳은 건 아니지만, 뇌를 내려놓게 됨은 확실하다.



내가 만약, 저 말을 했던 부장님을 찾아가서"부장님 말이 일부는 맞았던 것 같아요."라고 하면

왠지 특유의 경상도 억양으로 이렇게 답하실 것 같다.


"그래그래~ 그럴수록 자기 계발을 하고 말이야 어? 자격증 공부라도 하고 어? 그래야 되는기라~ 미라클 모닝 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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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굳이 찾아가진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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