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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Sep 13. 2022

[증상] 차이고 더러운 기분이 안 가실 때

사랑받았던 기억이 이리도 중요한 이유 :《관계의 재구성》_하지현 지음

하지현 교수님의 <관계의 재구성>. 읽은 지 10년 도 넘은 책인데 최근에 주변 친구들에게 추천했는데 절판이라서 구하기 힘들다고 한다.


집필 초창기인 2006년에 쓰신 책인데도 교수님의 인간관계에 대한 관심과 그 관심을 표현하는 교수님만의 재치가 느껴지는 책이다. 자칭 영화광답게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영화 속의 디테일한 장면을 들어 풀어냈다. 요즘 난 꽤 콤팩트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과거엔 얇고 넓게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해치워서' '관계 중독'에 걸린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란 말을 들을 때도 있었는데 말이다.

  

적은 수의 사람을 곁에 두면서 드는 생각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꼭 이성 관계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 이성 관계에 대입했을 때 개인적으로 이해가 더 쉽다. 과거에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를 대했던 태도, 그리고 그 태도가 나에게 미쳤던 영향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그 후에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일정 시간 동안 최소한 한 사람에게만은 존중받았던 기억이 있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든다. 물론 과거를 떠올렸을 때 애정이 다시 생겨나거나 딱히 그리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미건조하거나 차가운 느낌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나를 그렇게 아껴주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그 사실이 나 자신을 긍정적으로 포장할만한 그럴싸한 근거가 돼준다. 이처럼 자존감을 주는 것 외에도 다음 사람을 만날 때의 자세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반면 좋지 않은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면 아무리 스스로 쇄신의지를 다져도 이후의 건강한 관계를 갖는것이 어렵다. 단순히 생각하면 바로 다음에 만날 사람의 모습이 전 사람의 최악이었던 부분만을 덜어낸 불완전한 모습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막말만 안 하면 돼'라든지 '바람둥이만 아니면 돼'라는 조건은 나와 관계를 맺을 좋은 사람의 충분조건이 아닌데도 이전의 부정적 관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협한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 합리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가 붙는다.


차라리 그 과정에서 공허함을 느끼면 불행 중 다행이지만 그 최악의 단점만을 덜어낸 사람이 최고라고 단정 짓는 것은 더 위험하다. 억지스럽게 지어낸 피상적 행복은 오래가지 않을뿐더러 만약 또 다른 치명적 무언가가 발견되면 그 전의 트라우마까지 더해져 걷잡을 수 없이 스스로를 무너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로맨스를 떠나서 누군가가 진심으로 나를 존중했고 사랑해줬던 기억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최고의 에너지원이고 가치다. 반대의 경우라면 그 이상 대가 없이 사람을 좀 먹는 불행은 없을 것이다. 남녀는 만나고 헤어지기 마련이지만 그 끝이 어찌 됐든 만나는 과정에서 그런 감정을 주고받았다면 그것으로 그 관계는 충분히 유의미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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