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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J크로닌워너비 Mar 27. 2023

우울에 대해 다루려 합니다. (1)

그동안 우울에 대해 쓰지 못한 이유

브런치 작가 신청이 승인되었지만 한동안 우울에 대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글이 혹여나 우울을 겪는 이들에게 상처로 남을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을 들어볼까요. 예전에 상당히 울했을 , "자살을 뒤집으면 '살자'"라는 유명한 구를 듣고는 생각했습니다.


말장난하자는 건가? 우울과 자살을 가볍게 생각해도 정도가 있지, 이건 그냥 조롱이 아닌가. 같잖은 격려를 하느니 숫제 하지를 말던가.


나중에 우울 잦아들고 나서 저 어구를 말씀하신 분에 대해 찾아봤습니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분 역시 우울을 오래 겪으신 분이었고, 우울대처 책도 여럿 남기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질환의 고통으로 인해 스스로의 '살자'를 자살로 뒤집으시고 생을 마감하신 분이었습니다. 그제야 자살을 '살자'로 뒤집으란 말이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음을, 진심을 조소로 수용한 것은 스스로의 우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울증을 오래 앓았던 사람으로서, 말로든 글로든 우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각자의 서사가 있고 양육 과정이 차이나로 인한 무의식서로 다르기에, 모든 사람은 각자의 세계를 이룹니다. 동일한 자극이라도 세계가 어떻게 그걸 수용하는지는 별개의 사건이 됩니다. 그 세계를 들여다보지 않은 이 감히 왈가왈부할 수 없는 영역인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타인의 우울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고, 우울감을 다른 대상에 비유하는 것 역시 최대한 조심했습니다. 비유한 대상의 특성이 독자에겐 날카롭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시를 들어볼까요. 예전에 헬스장에서 135kg 바벨을 들면서 우울은 가능한 무거운 무게를 도전하는 데드 리프트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벨을 드는 순간, 제가 인지하는 세상은 육체가 느끼는 고통과 말아 쥔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바벨의 존재만이 남습니다.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숨 턱 막히며,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억겁 같은 3초간을 버텨내고 마침내, 바벨의 무게로 굽혀진 허리를 곧게 펴는데서 오는 뿌듯함은 우울을 극복했다고 생각했을 때 오는 성취감과 닮아 있었습니다. 예전엔 못 들던 바벨을 성장한 나는 들다는 것 역시 마음의 힘이 강해져 회피했던 어린 날의 우울을 마주하고 견뎌낼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135kg을 들어 올리자 PT 선생님도 깜짝 놀라시고는 마구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제 손에 피부가 벗겨진 것을 발견하시곤 소독약을 챙기러 가셨죠. 저는 피부가 벗겨진 줄도 모르다 빨간 포비돈이 생살에 닿자 그제야 쓰라린 줄 알았습니다. 상처를 소독하면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중량을 이겨내지 못하고 벗겨진 피부
오, 이것도 좋은 비유다. 우울을 견뎌내고 나서야 나에게 다가온 말/행동/사건에서 왜 상처를 받고 우울을 느꼈는지 파악이 가능하곤 했었지. 그러고 나면 있는 줄도 몰랐던 어릴 적 상처가 무의식에서부터 부상하여 그 존재감을 드러냈고. 이야, 이거 좋은 글감이다. 나중에 글 쓸 때 써먹어야겠다.


그렇게 머리로는 우울과 데드 리프트의 유사성을 정리함과 동시에 PT 선생님과 웨이트를 하면 생기는 상처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쌤 : 이제 이 상처가 아물면서 굳은살이 생길 거예요, 회원님. 그럼 진정한 헬스인이 되시는 거죠.


나 : 오 그렇군요 쌤. 바벨 잡으면서 굳은살 기는 거 뭔가 멋있긴 해요 ㅎㅎ


쌤 : ㅎㅎ 맞아요. 특히 손 잡을 때 헬스하면서 생긴 굳은살 어필하면 여자들 뻑가요~


나 : ㅋㅋㅋㅋㅋ 그것도 중대사기는 하네요. 근데 추후에 무게 올릴 때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나요? 상처 아물고 굳은살이 배기면 바벨 들 때 덜 아플 것 같아요.


쌤 : 그렇죠~ 헬스인들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죠. 굳은살은 저희한텐 "훈장"과도 같은 겁니다.



훈장. 공적과 업적을 표창하기 위해 주는 영전. 저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피가 차갑게 식어 오한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훈장은 명예를 상징하며, 남에게 보여주고 자랑하는 상황을 상정합니다. 때문에 굳은살과 훈장, 여기에 우울이 연결되는 순간 이 비유는 폭력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우울에서의 굳은살, 즉 우울을 극복한 과거는 훈장과도 같다고 가정할까요? 그러면 우울을 극복하는 것은 명예로운 행동이고 남들에게 자랑할만한 업적이라는 말이 됩니다. 과연 그런가요? 예전에 비해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나라는 우울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남아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우울에 대한 수기를 쓰시고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에 대한 인식도 개선되고는 있으나, 아직은 갈 길이 멉니다. 또 현증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들릴 수 있습니다. "우울을 극복하지 못한 너희들은 명예롭지 못하다." 때문에, 우울에 대해서는 굳은살이 훈장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애초에, 우울증을 '극복'한다는 표현도 부적절할 수 있습니다. 당장 브런치에만 봐도 수많은 '우울증 극복 후기'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근데 우울증을 '극복'한다는 표현이 어떻게 힘든 사람들에게 다가갈지도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상담만 10년 이상, 우울증 약물도 꽤 오래 먹다가 중단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필자 역시도 최근에 자살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머릿속 정리하고 나서도, '우울증 극복은 허상일 지도 모르겠다' 같은 생각 들고는 합니다. 어느 정도 안정된 저도 이럴진대, 현증 우울증을 겪는 이들에겐 어떨까요. '다른 이들은 다 극복하는데, 나만 극복하지 못하는구나'하며 우울로 침잠하는 시나리오는 개연성이 충분해 보입니다.


물론 '우울증에서 오래된 상처는 웨이트 운동에서의 굳은살과는 성질이 다르다' 같은 문장을 추가하면 문제가 덜 하겠지요. 극복이라는 단어도 위에 읽어보시면 '극복했다고 생각'이라는 표현으로 고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제가 직접 생각했던가요? 타인의 말에서부터 깨달았죠. 이를 풀어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울에 대한 표현은, 작가조차 인지하지 못한 칼날이 되어 상처를 남길 수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아예 우울에 대해 글을 쓰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울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걱정들을 어떻게 '극복'하여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는지는 다음 글에 적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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