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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J크로닌워너비 Apr 10. 2023

우울에 대해 다루려 합니다. (3)

무엇을, 어떻게 다루는지, 그리고 '왜?'에 대하여

우울에 대해 다루려는 스스로를 관조하며 깨닫고, 제 좌우명이 된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난 글에서 우울을 소재로 글을 써도 괜찮음을 깨달았습니다. 글쓰기에서 ‘무엇’을 정했으니 ‘어떻게 표현하느냐’를 고민을 할 차례입니다. 일단 내가 겪은 감정과 생각들을 적확한 단어로 표현을 해야겠지만, 독자에게 어떻게 닿을까도 생각해야 합니다. 다만 내 우울을 타인이 받아들일지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탄생, 어린 시절, 양육과정, 성장 과정, 겪은 트라우마까지. 각자의 개인사가 고유하죠. 각자의 삶의 궤적은 너무나도 상이한데, 과연 타인이 내 우울에 공감할 수 있을까? 우울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하시는, 혹은 이미 쓰신 작가님들도 한 번쯤은 고민할만한 주제입니다. 사람마다 마주하는 상황도, 느끼는 감정도, 그에 대한 대응방식도 다 다를 텐데, 내 글이 과연 어떻게 와닿을까?


고민하다 보면 '우울'이라는 감정 자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언어 체계가 같다 하더라도 각자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용처에서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듯이, 제가 느끼는 우울과 독자님의 우울이 같을 리는 없습니다. 같은 사건을 겪는다고 해도 자책하며 깊이 침잠할 수도, 뜨겁게 분노할 수도, 남의 탓으로 돌리며 회피할 수도 있듯이요. 각자의 우울도 마찬가지로 고유하며, 이에 대해서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작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우울을 노래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도 우울이란 감정이 어떻게 나에게 찾아왔는지, 같이 있을 때는 어땠으며 떠날 때는 무슨 느낌이었는지, 그래서 총체적으로 어떠한 단어로 다가왔는지를 말하려 합니다. 형태는 다를지라도, 우울이라는 감정을 겪고 있음은 같을 테니까요.


하나 여전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존재합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인이 사회의 규범이든 개인의 욕망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그 행동을 통해 무언가를 얻기 때문에 인간은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글쓰기에 골몰하는, 특히 우울을 묘사하려는 행동엔 이유가 있습니다.


왜 하필 ‘우울’에 대해서 일까요? 글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인정을 받고 싶다면 다른 주제에 대해 쓰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통계만 봐도 제 글 중에선 작가 심사 후기랑 여자친구와의 사랑 편지글이 인기가 많습니다. 경험상 우울 관련 글은 조회수가 많이 나오지 않아요. 그럼에도 저는 느리지만 꾸준히 활자로 우울을 그리려 합니다.


또한, ‘나’의 우울에 대해 묘사하려면 개인적인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는 부담을 져야 합니다. 저 역시 어느 정도로 제 개인사를 오픈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입니다. 지금은 필명을 쓰고 있어 익명성 뒤에 있는데도 말이죠. 더 나아가 현재 쓰는 소설이 잘 된다면 실명을 사용하는 것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즉, 개인적인 리스크가 있더라도 저는 제 우울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정신과를 지망하기에 그런 걸까요? 하지만 정신과 의국 입성만 놓고 본다면 제 우울증 과거력은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정신과 치료 이력이 있는 의사가 정신과를 희망하는 것은 현직 정신과 교수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다소 갈리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겪은 만큼 환자의 우울에 공감을 쉽게 할 수 있고 생각-감정-행동의 연결고리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 반면 치료자의 페르소나와 환자의 페르소나의 충돌로 인한 자멸의 위험, 혹은 자신의 경험을 잣대로 삼기에 환자를 대할 때 편견이 생긴다는 단점. 타당하지 않은 근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울증 이력을 드러내는 것은 정신과 의국 입성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위험들을 감수하고서라도 제가 글을 쓰는 동기는 무엇일까요. 무엇을 위해 제 우울을 논하려 할까요. 핵심은 ‘제가 우울을 겪으며 느낀 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제가 우울을 겪다가 빠져나오면서 느낀 바가 있습니다. 아무리 과거의 트라우마가 있다고 한들, 우울에 빠지게 되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고통이 너무 많습니다. 불교에서도 삶은 고해(苦海)라고 하고, 사는 것이 곧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그 고통의 크기를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의 핵심 중 하나겠지요.


하지만 우울에 빠지면, 스스로가 받는 고통의 크기를 늘리는데 무의식적으로 골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에게 닿는 세상의 모든 자극을 부정적으로, 고통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인식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향성을 '비합리적 신념'이라고도 부릅니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스스로가 불행을 증가시킨다는 인지 자체가 없이 그저 침잠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이 찾아왔다고 했을 때, 원인을 찾자면 다른 사람의 책임일 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수도, 어느 정도는 본인의 책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한 바로는 우울한 저는 상황 전체의 원인을 제 탓으로 돌리더군요.


단순히 원인을 찾고 이런 걸 넘어서,  온 세상이 나에게 적대적이고 살기 어렵다는 인식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가까운, 내가 속한 내집단 외의 다른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하고 적으로 간주하는 삶. 상상만 해도 힘들고 피곤한데, 저 역시도 그랬었고 얘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사회의 갈등 양상을 살펴보면, "넌 나보다 덜 힘들고 더 행복하잖아" 라며 서로를 불행의 골짜기로 끌어내리려는 듯한 무의식이 양 진영에 팽배해 있는 듯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제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면서, 혹시나 우울하고 세상이 살기 힘들다 느끼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더 나아가 스스로의 '불행하다는 믿음'을 깨고 나와서 행복한 삶을 얻으셨으면 하는 바람에 우울에 대해 글을 쓰고자 합니다. 아무리 삶이 고해라고 한 들, 스스로가 고통을 더 만들어서 자신의 어깨에 얹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고통의 망망대해를 표류할지, 삶의 바다를 항해할지는 자신의 인식과 믿음에 달려 있다는 걸 계속 쓸 예정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제가 우울을 어떻게 다뤘고, 우울한 상태에 빠졌다는 걸 어떻게 인지하는지 등을 다룰 것입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우울하셨던 분들이 제 글을 통해서 자신만의 행복에 도달하는 법을 깨달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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