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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J크로닌워너비 Apr 12. 2023

출간 제의 불발 후기

정말 감사하고 아쉽지만, 내 목표를 위해

출간 제의를 받았습니다. 책을 쓰고 싶다는 꿈이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게 다가올 줄은 몰랐기에, 제안을 덥석 받아 써볼까도 고민했습니다. 브런치 구독자 11명, 글 13개 남짓, 글 쓴 경력 1달 미만의 초보 작가에게는 과분한 기회이지만, 제가 글을 쓰는 목적과 제 글, 그리고 제가 낼 책에 대한 생각을 하면 반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받아보는 출간 제의 이메일


평범한 아침을 뒤집어 놓았던 출간 제의 메일. 내가 인정받았다는 기분에 벅차올라 흥분의 도가니로 자진 입수한 원이었죠. 하지만, 머리를 식히고 차분히, 몇 시간 고민하다 보니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물론 좋은 기회임은 맞고, 책을 출간했다면 분명 얻는 경험도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위험성도 분명히 있었어요. 이 경험으로부터 제가 작가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출간을 계획하시기 전에 본인의 글에 대해 생각하셔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1. 출판사의 기획 의도와 나의 역량?

제안을 주신 편집자 분 제 브런치 글 "우울에 대해 다루려 합니다"를 감명 깊게 보셨고, '우울'을 소재로 책을 획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전 당연히 '우울의 늪을 겪고 빠져나오는 과정을 에세이로 풀어나가는 책을 기획하는 중이시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회사명을 검색해 보니 IT나 과학 관련 도서가 한가득이었고, 수필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의아해하며 편집자님과 만나 얘기를 나눴더니, 출판사의 기획 의도는 제가 정신과 전문의는 아니지만 어쨌든 의사니까, 우울에 대해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가까웠습니다. 내색은 안 했지만 힘이 빠졌죠. 그건 적어도 아직은, 제 영역은 아닙니다.


물론 의대 졸업 후 국가고시 통과하여 정상적으로 의사가 되었기에, 의학 논문을 읽고 해석할 수도 있고 나아가 학술적인 글을 쓸 수도 있긴 합니다. 만약 제가 정신과 전공의 수준이기만 했어도 좀 더 고민을 오래 했을 것 같은데, 아예 수련을 받지 않은 일반의이기에 생각을 접었습니다. 관심이 있지 않은 이상 일반의의 정신의학 지식수준은 생각보다 높지 않아요. 진단명과 무슨 약 쓰는지 정도만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프로이트부터 페어베언이나 멜라니 클라인으로 이어지는 대상관계 이론이나 융의 분석심리학의 개념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정신의학에서야 중요하지만, 일반의 수준에선 시험에도 안 나오는데 왜 굳이 공부를 하겠어요. 정신과 전문의 입장에서 본 저는 사실상 약 이름 조금 더 알고 정신 분석 좀 오래 받은 환자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저는 우울증이란 질환에 대해 환자 역할만 10년 이상 한 사람이고, 치료자 역할은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의대생 시절 보호 병동에서 실습 돌았던 2주 정도를 억지를 부리면서 제 경력이라고 우길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게 큰 의미가 있을까요. 기획 의도를 생각했을 때 책의 저자에는 저보단 뇌과학 박사님이나 정신과 전문의 선생님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또한 저는 약물 치료는 2년 남짓만 받았지만, 상담은 10년 가까이 받았습니다. 때문에 현대 정신과학의 주류인 '질환의 생물학적 병인과 치료'보단 상담, 예컨대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 더 조예가 깊습니다. 이 출판사의 발간 도서들이 인문학보단 과학 분야에 치중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게 온 출간 제의는 애초에 저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 내가 이 출판사에서 계속 책을 쓸 건지?

만약 제가 이미 정신과 전문의였다고 가정해도, 출간 계약을 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예전에도 적었다시피 저는 소설과 에세이를 위주로 글을 쓰기 때문에, 제가 추구하는 책의 방향과 출판사의 방향이 다릅니다. 만일 제가 이 책을 도맡아 집필을 한다고 한들, 제가 쓴 다른 에세이나 소설이 이 출판사에서 출간이 될까요? 거부할 가능성이 크겠죠.


물론 소설이나 수필은 다른 출판사에서 내면 되지 않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지식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처음 출간부터 가능하면 나와 방향이 비슷한, 소위 'vibe'가 잘 맞는 출판사에서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브런치에서 쓰는 글은 독자에게 어떻게 읽힐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하지만 책을 출간하여 글이 상품이 되는 순간, 책이 어떻게 출판되어 소비자에게 다가갈지를 생각하는, 마케팅의 영역도 고려해야 합니다.


마케팅이라 하니 장사꾼처럼 보일 수도 있고, 남의 시선에 과도하게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단 글을 적을 예정인 제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글이 책이 되면, 주고받을 수 있는 물건이자 사고파는 상품이 된다는 것은 명명백백한 진실입니다.


때문에, 작가의 이미지 역시 생각해야 합니다. 마케팅은 보통 출판사에서 도맡아 진행을 합니다. 만약 출판사와 작가의 지향점이 비슷하면 괜찮겠으나, 다르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결과물이 나오느냐로 인해 작가의 이미지가 정해질 터인데, 스스로의 이미지를 출판사에 그대로 맡겨버리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되시나요? 또한 꾸준히 책을 내실 분들이라면 출판사를 여러 번 바꾸는 것이 소비자들에겐 '책 내기 급급해서 여기저기를 찔러보는 작가'로 보일 수도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셔야 합니다. 출판사를 정하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3. 나의 목표, 나의 꿈.

작가로서의 목표는, '소설가로 등단하기'입니다. 수필로도 작가가 되고 싶기는 하지만, 소설만큼 자연스럽게 읽히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담을 수 있는 글의 형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편집자님께 제 소설을 혹시 봐주실 수 있냐고 여쭤봤을 때, 출간의 가능성은 없다고 한 것, 제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이 말이 제일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무리 책을 내는 것이 꿈이라고 한들, 스스로 글을 쓰고자 하는 목표와 원동력을 등지고서는 책을 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정한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더 많은 시간과 노력과 금전이 들어갈 뿐입니다. 물론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제 글을 좋게 봐주시고 출간까지 제의해 주신 것은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지만, 제가 추구하는 목표와는 너무나 다른 방향이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쓰다 보면 실력은 늘고 습작은 아 작가로서의 깊이가 생깁니다. 단기적인 목표로 책을 출간하기에 급급한 것보단, 보르헤스처럼 스스로의 '바벨의 도서관'을 만들어 자신의 글세계를 공고히 다지는 것이 저는 우선이라 생각합니다. 제게는 "내가 무엇을 쓰고 싶고 어떤 것을 표현할 수 있는지, 그래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가 확고하게 잡혀 있어야, 작가 생활을 오래 해도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란 묘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니 전업 작가가 아닌 분들은 출간 제의를 받으셨다고 한들 조급해하지 마시고, 천천히 생각해 보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덕분에 직접 출판사에 방문도 해보고, 현직 편집자님과 얘기도 해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리고 좋은 글감에 화두까지 주셨네요. 참으로 감사한 제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이 글이 책 출간을 생각하시는 작가님께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저는 꿈을 위해 다시 소설을 쓰러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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