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부터 오트밀 베이킹을 가끔씩 하고 있다. 비건 베이킹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비건을 지향해서 하는 일이 아니고 그냥 순전히 맛과 건강 때문에 하는 거라서 오트밀 베이킹이라고 부른다. 비건 지향 여부와 비건 베이킹 명명에 아무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바나나 오트밀 구겔호프 케이크와 오트밀 사과 케이크, 베이크드 오트밀을 만들어 먹었다. 바나나 오트밀 구겔호프 케이크는 두 번 만들었다.
오트밀 베이킹을 한 이유는- 오트밀을 자주 먹은 지 몇 년 됐는데 오버나이트 오트밀이나 죽 말고 색다른 걸 해 먹고 싶었다. 이미 베이킹에 많이 쓰이는 재료라 오트밀 베이킹이 특별히 신선하지는 않다. 그냥 내게만 참신한 베이킹 재료일 뿐. 오트밀 베이킹도 집에서 간단히 할 수 있고, 오븐에 비하면 부족할 수 있지만 에어프라이어로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고 이미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만들길래 나도 해보고 싶었다.
플라하반 오트밀 인스타그램 콘텐츠도 영감을 줬다. 언니 소개로 이 계정을 알게 됐는데 오트밀 요리 정보를 굉장히 풍부하고 다양하게 알려줬다. 죽도 다양하게 해 먹을 수 있고, 쿠키나 빵, 리조또, 피자 등 여러 요리를 만들 수 있었다. 다 하나씩 해보고 싶었는데 빵이니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빵순이고, 커피에 빵 곁들여 먹을 때 무척 행복하고 평안하다.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이 주는 주말 특유의 여유, 특히 주일 예배가 끝난 뒤 여유를 좋아한다.
바나나 오트밀 케이크는 플라하반 레시피보다 예전에 한 연예인 유튜브 영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다. 그분은 바나나 팬케이크를 만들었는데 난 오트밀을 좋아하다 보니 오트밀과 바나나를 섞어서도 밀가루 1도 없는 건강식 케이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가 들었다. 근데 팬케이크 말고 예쁜 모양을 갖춘 그럴싸한 케이크를 만들고 싶었다. 때는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겨울.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케이크를 사지 말고 만들어 먹기로 하고 재료와 구겔호프 틀을 싰다.
바나나 오트밀 구겔호프 케이크. 사진=딱정벌레
여러 가지 이유로 케이크 준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폭설에 따른 비행기 결항으로 섬에 일주일 동안 머물다 크리스마스이브 오후에 집에 도착했고 피곤해서 크리스마스 아침까지 뻗었다. 누군가는 내가 거기서 편히 쉬다 왔을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일주일 내내 마음 한편은 긴장하고 있었다. 환경도 낯설고, 비행기가 결항된 뒤에는 언제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언제든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돼 있어야 한단 생각에 3일 동안 매일 짐을 새로 싸고 출발하지 못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렇다 보니 당장 크리스마스 전날이고 당일이 됐을 때도 케이크 만들 준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예배도 다녀와야 하고 오랜만에 공연도 보고 싶고, 근데 여독도 좀 풀고 싶고 바빴다. 결국 크리스마스 당일 저녁에 귀가해서 급한 대로 바나나와 오트밀, 계란을 함께 갈아 구겔호프 틀에 넣고 에어프라이어와 발뮤다 토스트 기에 넣어 각각 구웠는데 결과는 풋. 버터나 기름도 안 바르고 구워서 반죽은 틀에 들러붙고, 온도와 시간 조절도 미숙해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다. 반죽은 덜 익고 그냥 먹기에 덜 부담스러운 건강빵이 탄생했을 뿐.
이후 기름을 발라 다시 구웠는데 그때는 처음 시도했을 때와 비교해 반죽도 틀에 덜 붙고 모양도 그럴싸하게 완성됐다. 그러나 틀에서 반죽을 떼어낼 때 아주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았다. 모양이 조금 흐트러지기도 하고, 바삭하게 익진 않았다. 여전히 자기주장 강한 걸쭉함. 인터넷에 안내된 대로 똑같은 시간과 온도에 맞춰 굽더라도 오븐과 에어프라이어는 천지차이. 에어프라이어로 만들 때는 더 높은 온도에 더 오래 구워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과일로 꾸미니 모양은 그럴싸했다. 반죽이 찢어진 흔적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다. 샤인머스킷과 딸기로 주변을 꾸몄는데 사진으로 찍으니 디저트 카페에서 대접할만한 비주얼은 나왔다. 그러나 이것도 실제 먹어보면- 그래도 처음 만들었을 때보다는 괜찮았다. 작은 구겔호프 케이크는 도시락에 싸서 사무실 가서 간식으로 먹기도 했다. 크기가 한입에 넣기에도 괜찮고 어쨌든 밀가루 1도 안 넣었으니 건강에도 괜찮았다.
사과 오트밀 케이크. 사진=딱정벌레
이후 플라하반 오트밀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사과 오트밀 케이크 레시피를 발견하고 새로운 베이킹에 도전했다. 아쉽게도 알룰로스는 없었지만 사과나 베이킹파우더, 소금은 준비할 수 있으니. 커팅 사과를 사서 사각 썰기하고 오트밀과 우유, 베이킹파우더, 사과를 섞고 소금을 한 꼬집 넣고 위에는 견과류와 사과로 장식해서 에어프라이어로 구웠다. 이번엔 구겔호프 틀 말고 정사각형 오븐 틀을 써서 만들었는데 식빵 크기와 비슷했다. 틀에는 버터를 발랐다.
알룰로스를 위에 뿌리지 않아서 겉에 올린 견과류와 사과가 타버렸다. 겉은 바삭한데 속은 겉만큼 바삭하게 익지는 않았다. 탄 재료는 빼내고 새로 견과류와 사과를 올려서 발뮤다 토스터로 좀 더 익혔다. 그다음 틀에서 케이크를 빼내고 청귤청을 케이크 위에 얹어 꾸몄다. 견과류가 올라가 있으니 풍요로운 느낌도 들고 먹음직스러웠다. 칼로 썰어서 먹어봤는데 사과가 맛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당도도 제법 있고 맛있었다. 절반 이상은 먹어치운 듯하다. 이번에는 전보다 자신감이 더 생겼다.
그 이후 베이크드 오트밀도 만들고 싶어서 또 도전했다. 이건 사과 오트밀 케이크와 제조법에 별 차이는 없었다. 다른 게 있다면 반죽 안에 땅콩버터를 넣는 정도? 평소 땅콩버터를 잘 먹지도 않는데 이것 때문에 굳이 사고 싶지 않았다. 한 병에 8000원이 넘어서 비싸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래서 반죽 안에 오레오 치즈 케이크를 대신 넣어 구웠는데- 이번에는 전보다 좀 덜 익었고, 치즈 케이크가 들어간 부분만 맛있었다. 오레오 빨인 듯. 이번에 쓴 사과는 전보다 당도가 덜했다.
오트밀 베이킹을 하면 일단 결과물이 건강식이란 점이 좋다. 맛도 그럭저럭 괜찮다. 역시 버터를 발라야 한다. 버터를 바르면 일단 냄새가 좋다. 베이킹파우더를 넣으면 적당히 부풀아 올라서 빵 비주얼도 살리고. 조금 덜 익어도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븐을 썼다면 더 잘 익고 완성도 높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까란 아쉬움은 든다. 사과도 복불복이라 맛있는 사과를 넣어야 케이크도 맛있어진다.
베이크드 오트밀. 사진=딱정벌레
다음에 또 만든다면 그때는 베이크드 오트밀을 만들 거다. 최근 집에 땅콩버터가 생겼기 때문. 어차피 굽는 건 기계가 하고 난 재료 썰고 섞기만 해서 크게 하는 건 없다만. 최근에는 오트밀 베이킹을 못했다. 몸이 안 좋아서 주말에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을 못 쓰거나 뻗어있기도 하고. 요즘은 마음도 괴로워서 생각하지 않기 위해 잠에만 빠져 있는 날도 잦다. 이번 주말이 특히 그랬다. 여러 시도로 시행착오를 겪었으니 다음엔 더 수월하게 하겠거니 하고 잠시 손을 놓기도 했다.
그래도 오트밀 베이킹을 하면 좋은 게- 이건 요리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일단 결과물이 완성되면 성취감이 든다는 점이다. 뿌듯하기도 하고, 날 위해 스스로 뭔가를 만든다는 사실 자체가 흐뭇하고 기분이 좋다. 그게 심지어 건강식이고 맛도 적당히 있으면 기쁨이 배가 된다. 집안 가득 퍼지는 버터 냄새가 향기롭고 음식을 더 먹음직하게 만든다. 특히 정사각형 사과 오트밀 케이크를 칼로 썰어서 한입 베어 불며 커피를 곁들여 마실 때 만족감이란. 여러 고민과 문제가 정리되고 수습되며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아도 될 상황이 되면, 몸 상태를 아주 회복하면 다시 베이킹을 제대로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