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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맛과 인생 흐름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에서

by 혜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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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을을 가장 확실하게 느끼게 해주는 건 낙엽이다. 사철 내내 똑같은 길도, 이 시기만 되면 온통 색이 변하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낙엽을 밟는 걸 좋아한다. 집 주변 산책로나 공원 길을 걷다 보면 굳이 낙엽이 쌓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 위를 걸을 때마다 발끝에서 올라오는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참 묘하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인데, 굳이 맛으로 표현하자면 ‘고소하다’라는 말이 가장 잘 맞는 것 같다. 잠깐 발을 멈추게 하고, 별 의미 없이 지나치던 풍경도 다시 보게 만드는 그런 소리다.

며칠 전에도 퇴근길에 집 근처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 푸근하게 쌓인 낙엽을 밟아가며 생각했다. 낙엽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위한 준비를 하는 중일뿐이라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오래 품었던 계획이 틀어지거나, 혹은 누군가와의 관계가 자연스레 멀어질 때… 마치 한순간에 낙엽처럼 떨어져 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하지만 가을 낙엽을 보며 생각하게 된다. 버려지는 게 아니라, 흐름의 일부였다는 것을.

나무는 잎을 떨구며 겨울을 버티기 위한 에너지를 모으고, 봄에 다시 푸른 생명을 틔우기 위해 자신을 가볍게 만든다. 필요 없는 것은 내려놓고, 다음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낙엽은 땅에 떨어지고 나서도 역할이 있다. 흙이 되고, 겨울을 덮어 보호하며, 다시 누군가의 생명이 자라날 기초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낙엽의 삶은 어느 부분도 ‘버려짐’이 아니라 온전히 ‘준비’다. 나 역시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리면, 버려졌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사실은 다음 계절로 넘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때의 상실감과 공허함을 견디며, 나는 땅 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뿌리를 내리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조금은 단단해졌고, 조금은 더 유연해진 것 같다.

요즘 들어 부쩍 인생이 흐르는 방향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다. 흐름은 내 의지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때때로 밀려오는 파도를 막을 수 없을 때도 있고, 내 힘으로는 돌릴 수 없는 순간도 분명 있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흐름을 바꿀 수 없다면 그 흐름에 자신을 실어 보내는 법을 배우는 것도 하나의 성장 아닐까. 마치 바람이 낙엽을 데리고 어디론가 흘러가듯이.

그렇다고 흐름에 무기력하게 떠밀려만 가는 건 아니다. 낙엽은 떨어지는 순간에도 결코 목적 없이 흩어지지 않는다. 바람이 흔들어도, 땅이 품어주고, 계절이 다시 돌아와 새싹을 틔우게 한다.

나도 그런 인생의 흐름 속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을 준비하고,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리는 대신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느꼈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굳어버린 욕심이 삶을 무겁게 만들곤 한다.

하지만 오늘도 낙엽을 밟으며 생각한다.
떨어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가벼워짐일 뿐이라고. 버려진 게 아니라, 준비하고 있었다고.

발끝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면 신기하게도 마음속에서도 작은 울림이 일어난다. 어떤 일은 잊힌 것 같아도, 어떤 기억은 사라진 것 같아도, 결국 모두가 내 삶의 새로운 계절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줄 거라는 작은 확신 것이다.

올해 가을도 또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밟고 지나간 낙엽처럼, 이 계절이 나에게 남긴 흔적은 오래오래 마음 어딘가에 고소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오면,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진 가지로, 새로운 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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