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꺼내든 테스터기를 만지면서
지난 주말, 유난히 추워 온 가족이 집안에 있던 오후였다. 각자 할 일을 하며 시간이 흐르는 중 느닷없이 큰아들이 방에서 나와 말했다.
“아빠, PC 전원이 안 켜져.”
요즘, 어느 장치이던지 ‘전원이 안 켜진다’는 말은 단순한 고장이 아니라, 무언가 모든 것을 멈췄다는 신호처럼 들린다. 특히 PC는 학생의 신분인 아들에게는 과제도, 게임도, 친구와의 약속도 모두 그 작은 전원 버튼 하나에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는 일이 있어 조금 귀찮았지만 그래도 아들이 아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아들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옆에 놓인 본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히 있었다.
전원 스위치를 눌러보았다. 반응이 없다. 케이블을 뺐다 다시 꽂아보고, 멀티탭을 확인하고, 콘센트를 바꿔보는 기본적인 동작을 하다 보니 예전의 습관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전원 스위치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원인이 좁혀졌다. 램이 문제인가? ‘*SMPS일 가능성이 크겠는데….’
* SMPS((Switching Mode Power Supply): 트랜지스터 등의 스위칭 소자를 고속으로 ON/OFF 하여 효율적으로 전압을 변환하는 전자식 전원 장치
문득,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테스터기가 떠올랐다. 10년도 넘게 꺼내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먼지를 털어내며 손에 쥐는 순간, 묘하게 손에 익은 감각이 되살아났다. 사용 흔적이 남은 다이얼, 살짝 굳어 있는 리드선. 이걸 마지막으로 쓴 게 언제였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다 말고 바로 PC 본체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SMPS 커넥터 I/O 포트 설명서를 휴대폰으로 찾아보며 하나하나 전압을 체크했다. 빨간 선, 노란 선, 검은 선. 수치는 예상과 달랐고, 강제 ON을 위해 쇼트도 시도해 보았지만 팬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지만, 손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 혹시 내가 놓친 게 있을지 모른다는 마음이 계속해서 다음 동작을 부추겼다.
불편한 자세로 한참을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뻐근해지고 무릎이 저릿저릿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짜증보다는 묘한 즐거움이 먼저 올라왔다. 고장이 난 PC를 고치는 일 자체보다, 그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이 나를 끌어당겼다. 전압 하나, 커넥터 하나에 집중하며 주변의 소음이 사라지는 느낌.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몰입하던, 아주 오래 전의 내가 그 자리에 다시 앉아 있는 듯했다.
나는 한때 자동화 로봇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일을 10년 넘게 했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맞물려 움직이던 현장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프로그램한 줄 때문에 밤을 새운 적도 있었고, 단순한 배선 문제를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맨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원인을 찾아냈을 때의 그 짜릿함, ‘아, 이거였구나’ 하고 무릎을 치던 순간들은 지금도 또렷하다.
그 시절의 나는 늘 바빴지만 이상하게도 지치지 않았다. 개선이 필요하면 도면을 들여다보고, 로직을 수정하고, 다시 테스트하며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다. 누군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이해하고 납득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었기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PC 앞에서 테스터기를 들고 있던 그날, 나는 오랜만에 그 감정을 다시 느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SMPS 고장. 자가 수리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들에게 서비스 센터에 문의해 보라고 말했다. 뭔가 대단한 해결을 해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함께 들여다봐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PC와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고, 나는 테스터기를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았다. 공구함을 닫는 순간, 묘하게 아쉬운 기분이 드는지는 모르겠다.
요즘의 나는 예전처럼 기계를 직접 만질 일이 많지 않다. 회사, 집에서도 그렇고 몸을 쓰는 물리적인 일보다는 디지털 환경에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분명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지만, 가끔은 손끝으로 전해지는 감각이 그리워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를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풀어가던 시간, 실패와 재시도를 반복하며 스스로를 설득하던 과정 말이다.
지난 주말의 시간은 몸은 불편했고 결과는 ‘고장’이라는 단순한 결론이었지만, 정말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몰입의 감각, 시간의 흐름이 사라지는 경험을 다시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아마도 삶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전의 나를 불쑥 데려다 놓는지도 모르겠다. 고장 난 PC 하나 덕분에, 나는 잠시 과거의 나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우리가 좋아했던 것들, 잘했던 것들, 몰입했던 시간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잠시 서랍 속에 들어가 있듯이 현재라는 시간을 털어낼 용기만 있다면, 언제든 다시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