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결 쓰기

마음이 깊은 아내에게 배운다.

더 깊어지고 잘해야 할 아내에 대한 사랑

by 혜윰사

아내는 활발해 보이기는 하지만 내향적이다. 말수가 적고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상황을 읽고, 집 안의 공기를 살피며 필요한 자리를 채운다. 반대로 나는 두리뭉실하다. 결정은 늦고 생각은 많다. 명확하지 않은 태도로 시간을 보내는 날도 적지 않다. 그런 우리가 27년째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진짜 한 성인으로서 살아야 할 준비를 하고 있는 대학 4학년의 큰 아들과 올해 복학하는 대학 2학년의 작은 아들이 한집에서 시간을 나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여느 집과 같이 소란스러웠다. 웃음과 울음, 다툼과 화해가 빠르게 오갔다. 지금의 집은 그때와 다르다. 소리는 줄었지만 무언가 무거운 것이 있다. 방문이 닫혀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각자의 일정이 집 안의 리듬을 만든다. 새벽에 들어오는 발소리, 늦은 밤까지 켜진 스탠드 불빛, 시험 기간이면 더 조용해지는 공기. 그 속에서 아내는 여전히 집의 중심을 잡고 있다.

아내는 아이들이 대학생이 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잔소리를 줄였고, 대신 기다림이 늘었다. 묻고 싶은 말이 있어도 먼저 삼킨다. 성적, 진로, 인간관계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아내는 아이들이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안다.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넓어질수록 부모의 마음은 더 불안해지기 마련이니까.

나는 여전히 한발 물러선다. “이제 다 컸잖아”라는 말을 쉽게 한다. 책임에서 빠져나오는 말이기도 하고, 상황을 단순화하려는 나의 습관이기도 하다. 아내는 그런 말을 듣고도 굳이 반박하지 않는다. 대신 필요한 순간에 아이들의 편에 서고, 또 필요한 순간에는 부모의 선을 분명히 긋는다. 그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새삼 요즘따라 더 느껴진다.

겉으로 보면 아내는 늘 차분하다. 아이들이 밤늦게 들어와도, 진로를 두고 고민이 길어져도 표정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가끔 괜찮은 줄 알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산 시간이 쌓이면서 그 차분함은 선택이라는 것과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에서 가족이 함께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감정을 다듬고 말을 고르며 하루를 버텨낸 결과라는 것을 느끼고 알게 된다.

최근에 아내에게서 뜻밖의 용돈을 받았다. 깜짝 선물이라고 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숨겨두고 있던 것이라며 내게 내밀었다. “당신을 위해 써.” 그 말을 듣는 순간, 손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보다 먼저 든 생각은 이 돈을 내가 써도 되나 하는 망설임이었다.

아내는 내 반응을 보고 말했다. “당신은 늘 그래.” 그 말에는 서운함과 이해가 함께 담겨 있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내가 바란 건 내가 그 돈으로 무엇을 사느냐가 아니라, 나 자신을 조금 더 소중히 여기길 바랐다는 것을. 가족을 위해 뒤로 물러나 있는 나 말고, 나를 위해 선택하고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돌이켜보면 아내는 늘 그렇게 나를 살폈다. 내가 일에 지쳐 말이 줄어들면 묻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해주거나, 집안 문제등 마음이 복잡해 보이면 산책을 제안했다. 아들들 앞에서는 부부의 불안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부모가 흔들리면 아이들도 흔들린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랑은 거창한 말이 아니라, 그런 선택의 반복이라는 걸 아내는 일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아내를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향적이지만 단단하고, 웬만한 일에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래서 기대고, 맡기고, 안심했다. 하지만 강하다는 말 뒤에는 외롭다는 의미도 숨어 있었다. 누군가 대신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접고 스스로 버텨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저 나만 생각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언젠가 아들들은 집을 떠난다. 졸업과 취업 같은 단어들이 현실이 되어 다가올 것이다. 집은 더 조용해질 것이고, 부부만의 시간이 다시 늘어날 것이다. 그때도 아내는 여전히 웃으려 할 것이다. 분위기를 지키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닌 같이 해야 함을 알고 있다.

그 돈은 아직 쓰지 않았다. 통장 한캰에 조용히 남겨두었다. 언젠가 쓸 것이다. 아내와 단둘이 떠나는 짧은 여행일 수도 있고, 가족 기념일날 식사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 돈에 담긴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예전보다 깊어졌다는 걸 요즘 실감한다. 설레는 사랑이 아니라, 존중과 미안함, 그리고 다짐이 섞인 사랑이다.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더 표현하고, 더 책임지고, 더 곁에 서겠다는 마음...

결혼은 서로를 완성시키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알아가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말을 새삼 더 가슴에 새기게 된다. 중년을 넘어선 아내와 뭔가 부족하고 두리뭉실한 내가, 그리고 두 아들과 같은 집에서 각자의 시간을 살아간다.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다. 그리고 좀 더 잘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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