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짐의 문제는 도처에 산재한다. 각종 기름을 사용하는 산업현장 노동자나 빙판에서도 활동해야 하는 군인과 구조대원, 조리나 청소 등으로 물이 고인 바닥에서 일해야 할 때가 있는 이들 모두 미끄러짐에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 그 미끄러짐이 부른 안타까운 사고 때문에 탄생한 브랜드가 있다. 등산화 바닥에 붙은 노란 팔각형 로고로 유명한 ‘비브람(Vibram)’이다.
비브람을 창업한 비탈레 브라마니(Vitale Bramani)는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의 산악인이었다. 그는 1935년 알프스를 오르다 6명의 동료를 잃는 비극적인 경험을 했다. 이 안타까운 사고의 원인이 미끄럽고 제대로 발을 지켜주지 못하는 등산화, 특히 밑창 때문이라고 생각한 브라마니는 눈이나 얼음은 물론, 다양한 지형에서도 뛰어난 접지력을 발휘하는 밑창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생고무에 황을 첨가한 가황고무가 높은 탄성과 내구성 덕에 등산화에 적용하기 좋겠다고 생각한 그는 이탈리아의 유명 타이어 제조업체 피렐리와 손잡고 1937년 첫 제품을 출시했다. 아직도 수많은 등산화에 쓰이고 있는 고유의 미끄럼 방지 패턴을 새겨넣은 ‘카라마토(Carrarmato)’ 밑창이다.
비브람은 밑창 제조기술에 있어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눈에 띄는 브랜드는 아니다. 구두든, 운동화든, 등산화든 대부분의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디자인과 소재에 먼저 눈이 가게 마련이다. 신체의 가장 아래쪽, 바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밑창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은 적다. 뜻하지 않은 인명사고를 계기로 비브람은 밑창을 향해 눈을 돌렸고, 그 결과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누구나 인정하는 브랜드로 우뚝 서게 됐다.
미끄러운 바닥에서도 흔들림 없이 잡아주는 밑창을 지향한 브랜드의 정체성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얼음 위를 걸어도 미끄러지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악틱 그립’ 밑창을 시연하기 위해 비브람은 미국 뉴욕 한복판에 두꺼운 얼음으로 미끄럼틀을 만든 적이 있다. 한쪽에는 행인들이 신고 있던 본래 자신의 신발을, 그리고 다른 한쪽 발에는 악틱 그립 밑창이 달린 신발을 신고 기울어진 얼음 사면을 걸어가게 했다. 보통의 구두나 운동화를 신은 한쪽 발은 속절없이 미끄러졌지만 다른 한쪽 발이 전혀 밀리지 않고 버틴 덕에 얼음 위를 여유 있게 걸어가는 모습은 제품의 신뢰성을 한눈에 보여줬다.
* 악틱그립 시연행사 보기 : https://www.youtube.com/watch?v=BjrzdYz5ugM
비브람은 30여개의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밑창 제품군을 선보이고 있다. 미끄럼 방지 기능만 해도 얼음이나 물, 기름 등 서로 다른 환경에 특화된 제품군으로 나뉘어 있고, 산업용 안전화 밑창이나 소방용 내화처리 밑창 등은 그 자체로 신발의 기능 대부분을 함축한 제품들이다. 특히 이들이 1967년 내놓은 ‘시큐리티솔’ 안전화는 이들이 만들어 판매한 제품이 신발을 구성하는 일부임에도 최초로 ‘평생 품질보증’ 방침을 내세워 주목과 신뢰를 함께 받았다.
여기에 구두나 캐주얼화 등 일상용 신발을 위한 보다 유연하고 편안한 밑창 역시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 다른 취미활동에 비해 신발의 비중이 큰 등산의 경우 등산화를 구매할 때 신발 브랜드는 물론 밑창이 어느 회사 제품인지까지 확인하는 경우도 많아 비브람의 인지도가 더욱 높기도 하다.
1937년 창업한 비브람이 세계적인 명성을 높이게 된 계기도 등산화 분야에서의 높은 품질이 밑바탕이 됐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고, 가장 험하다고 악명이 높아 에베레스트보다 1년 늦은 1954년에야 첫 등정에 성공한 K2를 최초로 오른 등산화가 비브람 밑창을 사용했다. 창업자인 비탈레 브라마니도 소속돼 있었던 이탈리아 산악회(CAI)의 전문 등반가들이 최초로 K2를 정복하면서 등산화 브랜드인 돌로미테(Dolomite) 못지않게 비브람도 눈길을 끌었다. 단순 트레킹용과 전문 등산화, 고산 등정용 특수화 등 등산화의 갈래가 세분화된 것도 비브람이 이때부터 제품군을 다양화한 데 따른 것이다.
등산이나 행군, 산업용이나 일상용 같은 다양한 상황에 맞춰 나오는 여러 신발 제조업체의 요구에 딱 맞는 제품을 납품한 것 역시 비브람의 성공 요인이 됐다. 신발 제조업체가 원하는 신발의 특성에 맞게 비브람 자체 기술센터의 전문 연구를 거쳐 특정 비율로 재료들을 배합한 화합물(compound) 소재와 특수 패턴으로 최고의 착화감을 이끌어내는 데 주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비브람 밑창의 노란 팔각형 로고가 신발 브랜드의 마케팅 요소가 될 정도로 입지가 역전될 때도 많다. 이처럼 1차 고객인 제조사의 요구에 누구보다 충실하지만, 납품을 거절할 이유가 되는 요구도 있다. 1969년부터 쓰인 이 노란 비브람 로고를 새기지 않고 밑창을 납품하라는 요구다. 자신이 만든 제품이라는 점을 당당하게 보이겠다는 자신감의 발로다.
이들의 자신감을 우습게 볼 수 없는 것은 단지 이들이 업계에서 시기적으로나 매출로나 가장 앞서 있기 때문이 아니다. 개발한 기술을 무엇보다 실제 현장에서 검증하기 때문이다. 실험실에서 구상하고 만들어진 제품들은 등산을 비롯한 각종 야외 스포츠 선수들에 의해 세계 각지의 현장이 바로 테스트 장소가 된다. 이들이 검증하며 지나는 거리만 연평균 100만㎞에 달한다. 그리고 이렇게 수집된 데이터가 다시 미국과 중국의 기술센터로 전달되면 생산과정에서의 엄격한 품질 관리까지 거쳐 소비자들에게 전달된다.
완제품인 신발 대신 ‘부품’인 밑창으로만 한우물을 판 비브람에도 완제품 신발이 없는 것은 아니다. ‘파이브핑거스’와 ‘컴포넌트’ 같은 신발 제품은 생김새부터가 독특하다. 파이브핑거스는 흔히 ‘발가락 양말’로 불리는 양말과 비슷한 모양으로 발가락 하나하나를 따로 집어넣게 만든 디자인으로 2005년 출시 직후부터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화제를 모았다. 여기에 비브람의 정체성인 밑창만 부각해 충격을 흡수하는 중창과 안창은 최소화한 두 제품의 특성도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다. 인류가 오랜 기간 유지해온 맨발 걸음의 느낌을 충실히 재현한다거나, 비브람의 첫 제품인 카라마토 밑창의 현대적 재해석을 내세우며 이들만이 만들 수 있는 제품을 내놓았다.
브랜드의 세계에서도 자칫 정상의 자리에서 미끄러져 추락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신생기업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며 선두를 빼앗기는 경우도 있고, 최고라는 자만감에 도취해 방만한 경영을 일삼다 자멸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비브람이라고 해서 언제까지고 현재의 위치를 지켜갈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확실한 교훈 하나는 준다. 어떤 높은 봉우리도 한발 한발 신뢰와 검증으로 내디딜 때만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