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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커피는 필요해 2

생활의 루틴

교토, 로쿠요샤 커피 - 내가 좋아하는 커피집



미국의 소설가이자 예술평론가인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일부러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등 일종의 예열과정을 거친다고 했습니다. 

'시작하기'는 어느 면에서 '미루기'와 같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일부러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곤 한다. 일종의 예열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이 시간이 길어지면 결국 불안해진다. 글을 쓰지 않고 있다는 죄책감이랄까.

-작가의 책상 中, 질 크레먼츠 지음 / 위즈덤 하우스-



저도 이른 아침 출근을 하면 일종의 예열과정을 거칩니다. 블루투스로 연결된 오디오의 전원을 켜고 음악을 선곡한 뒤, 물을 끓이고 커피콩을 갑니다. 종이 필터를 드리퍼에 깔고 믈로 한 번 적셔 종이 냄새를 제거한 다음, 커피콩을 붓고 '통통' 두드려 평평하게 만듭니다. 표면이 울퉁불통하면 맛있는 커피가 '짠'하고 나타나지 않을테니까요. 


그런 다음, 전기 포트에서 끓인 물을 드립 주전자에 옮겨 담습니다. '팔팔' 끓어 뜨거운 물이 저기에서 여기로 옮겨 오며 조금 식을테지요. 맛있게 마실 수 있는 물의 온도라고 생각합니다. 필터에 평평하게 쌓인 커피 가루 가운데를 가는 대나무 꼬치로 '뿡'하고 뚫습니다. 사이로 물을 붓고 뜸을 들입니다. 뜸을 들이는 내내 기도합니다. '맛있는 커피를 맛보게 해주세요'  기도가 끝나면 커피 잔에 뜨거운 물을 채워 반드시 따듯하게 해둡니다. 커피 잔을 따듯하게 데우는 것만으로도 맛있는 커피가 있습니다. 


이제 커피를 본격적으로 추출합니다. 적시고 나서 몇 초, 그런 것보단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전체를 골고루 적셔 줍니다. 나만의 포인트를 두면서 조금씩, 빨리 커피를 추출합니다. 커피도 살아 있는 생명체라 사람에게 주는 애정을 쏟으면 맛으로 보답합니다. 결국 커피를 내리는 것은 좋은 성능의 기계가 아닌 사람의 마음이라고 느낍니다. 추출한 커피를 미리 데워진 커피 잔에 붓고 조금씩 훌쩍 마십니다.


수전 손택이 했던 얘기가 어렴풋이 공감이 되는 순간입니다. 다만 그녀와 달리 예열시간이 길어진다고 해서 죄책감 따위는 들지 않습니다. 늦어지면 늦어지는대로 조금 더 일을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결국 단단히 이어져 오늘과 내일을 이어줄테니까요. 예열과정에서 참 얻는 게 많습니다.


2020. 01.09 

좋은 커피는 필요해 2 - 생활의 루틴

물론 오늘도 교토 로쿠요샤 커피에 가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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