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안녕’과 스페인어의 'Hola'는 음성적인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분명 다르다. 둘 다 상대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나, 한국의 ‘안녕’에는 나와 상대의 안부가 들어있다. 스페인어는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Que tal’과 같은 추가적인 질문을 같이 말해야 한다.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쓰는 쿠바와 한국은 ‘안녕’과 ‘Hola’ 만큼의 차이가 있다. 나는 한국에 단단하게 뿌리 박혀 있다. 내 조상들은 한국에서 떠나본 적이 없다. 문서상으로도, 역사상으로도 나는 ‘한국인’이라고 명확히 말할 수 있다. 고민 없이 직관적으로 한국어를 내뱉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뿌리 뽑혀 온 이들의 후손이다. 이들의 조상은 분명히 한국이 고향이었지만, 이들의 후손은 다르다. 태어난 고향과 부모의 고향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 그 두 가지를 가지고 삶을 일궈나가기에는 퍽 쉽지 않다. 이들과 인터뷰를 하다보면 공통적으로 삶의 어려움이 나온다. 어느 나라건 생활기반 자체가 없는 이민자들에게 쉬운 나라는 없다. 하루라도 빨리 그 환경에 적응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생활인의 비애, 자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고향을 위해 이곳의 삶을 놓으라고 하는 것은 여유로운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일테다. 쿠바는 스페인어만을, 한국은 한국어만을 공용어로 쓴다. 하나의 세계에는 하나의 언어가 있다. 사람들은 그 언어의 바깥을 쉽게 나갈 수 없다. 그 언어 안에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Hola’ 뒤에 ‘Que tal?’을 붙인 것은 거의 손에 꼽는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인터뷰 대상자들은 모두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그 정확한 발음들에 나는 안심했던 적이 많았다. 이들이 아버지, 할아버지들에게 물려받은 "안녕하세요"는 깊은 말의 결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원류로 향하는 결. 진화론에 따르면, 우리는 무언가가 진화하면서 상황에 맞춰 모습을 바꿔가며 만들어졌다. 달리 말하면 결국 우리는 파생된 것이고, 그것에는 원류가 있다. 그 기간을 현재로 잡으면, 나는 인터뷰 대상자들과 다르다. 그러나 100년 전으로 잡으면 같다. 더 오래된 과거로 올라가면 우리는 형체의 구분마저 없는 동일한 것이 된다. '안녕'과 'Hola'는 분명 다르다. 그 안에 내포된 함의도 분명 다르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상대에게 닿고 싶을 때 말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나누면서 경계는 무너진다. 우리는 분화했지만 결국 하나가 되고자 한다. 내가 "Hola"로 상대를 부르고, 상대는 그 말을 길 삼아 "안녕하세요"라며 나의 부름에 응한다. 대화의 순간에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시공간은 무의미해진다. 오직 말만이 힘을 가진다. 말은 바다와 시간을 넘어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이끈다. 분화된 현재,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 아닌 상대는 서로가 되어 다르고 속내를 알 수 없다. 서로의 간격이 무섭지만, 그럼에도 "안녕"이라고 말하며 서로는 우리로 나아간다. 어쩌면 분화는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하나 더 얻기 위해 생긴 건지도 모른다. 곤궁한 것들은 사랑으로써 채워진다.오늘도 나는 쿠바의 우리를 생각한다. 우리의 안녕들을 사랑하며.
사랑은 과잉이 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머물 수가 있다.온전하게, 오직 그것, 단지 사랑이라는 자신으로. -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