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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nzan Feb 17. 2019

1998년, 저 태권도 다닐래요!

7살 여자아이의 놀이터



늘 면접을 볼 때면 이력서란에 쓰여있는 한 줄 때문에 호기심 가득한 면접관들의 눈빛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격증.


나는 이력서란에 늘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는 자격증이 있다. 남들은 뭐 하나라도 더 넣으려고 난린데 그걸 왜 고민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취득한 자격증만큼 잘하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그만큼의 실력도 아닐뿐더러, “작은 키에 발은 여기까지 닿으세요?”의 인신공격과 “꽤 운동하셨다는 분이 이것도 못 들어서 되겠어요?”의 무례한 발언들로부터 보호받고 싶었다.


어렸을 적부터 작은 체구에 걱정이 많던 부모님은 나를 오래도록 운동을 시키셨다. 다름 아닌 태권도였다. 7살부터 고1 때까지 인생의 전부라 여기며 다니던 체육관, 대학교 와서도 또 태권도 동아리 그렇게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태권도 4단, 합기도 2단


내가 7살 때만 하더라도 체육관에서 여성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또한 그때는 체벌이 폭력이 아니라 사랑의 매로 통하는 시대였는데, 우리 엄마 또한 오빠랑 나를 체육관에 보낼 때 '우리 애들 때려도 되니까 어디 가서 욕은 안 듣게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라고 하시며 맡겼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진짜 우리를 다리 밑에서 주웠나 생각이 들 정도다.(엄마 사랑해요)


내겐 총 3명의 관장님이 있었다.

 

첫 번째 관장님은 나를 기초부터 탄탄히 가르쳐 시범단의 센터로 만든 장본인이다. 쌍절곤은 기본으로 차력쇼에서나 나올법한 계란 1판 위에 올라가 걷기, 수많은 못 위에서 기본 동작하기 등 별의별 훈련을  다 받았던 것 같다. 전지훈련이라도 가는 날이면 정말이지... 아직도 밖에서 훈련했던 것들 중 기억에 남는 훈련을 꼽으라면 제주도, 정방폭포에서 그 많은 돌계단을 쪼그려 뛰기로 오르락내리락했던 게 기억난다. 땀이 잘 나지 않는 체질인데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땀이 방울방울로 떨어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관장님은 시범단의 센터를 넘어 모든 시범 공연에 나를 집어넣었다. 고강도의 훈련들이었다. 남들은 낙법 연습할 때 나는 덤블링 연습을 했고, 남들 기본 발차기 연습할 때 나는 외발, 540도 구분 동작을 연습했고, 남들 다리 째기 할 때 나는 180도 이상을 찢어야 했다. 태권무라도 연습하는 날에는 눈 감고도 모든 동작들의 완벽함은 물론 위치 반경까지 정확해야 했다.


또한 관장님의 완벽주의 성향 탓에 표정 하나까지 흐트러짐이 없어야 했다. 하루는 '턴 돌려차기'라는 발차기를 7번 연속으로 격파하던 중에 송판에 잘못 맞아 발등이 너무 아팠다. 그 한 번의 찡그림으로 나는 그 날 내 엉덩이와 발은 터져라 맞았다. 우리 팀의 그 누군가 동작 하나라도 틀리는 날엔 발바닥, 엉덩이는 부어올랐고, 그렇게 시범단 공연 연습하는 날에는 맞지 않은 날이 없었다.(공포스러웠던 순간이 여럿 있었는데 사실 지금에야 이것이 아동학대에 해당하는 행위임을 성인이 돼서야 알았다.)


그렇게 이 두 분은 내 어린 시절 부모님보다 함께 한 시간이 많아 두 분을 빼고는 어린 시절을 설명할 수 없다.


그때는 내 삶의 전부라 생각했던 사람들, 그랬던 스승들이 체육관 확장으로 우리 팀을 이용하고 또 이용하더니 말 없이 떠났다. 엄마는 첫 번째 관장님이 그렇게 가버린 후 내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해 두 번째 관장님껜 그렇게 갈 거면 말이라도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었건만 두 번째 관장님도 그렇게 가버렸다. 그 어린 나이에도 알 수 있었다. 욕심 때문에 우리를 저버린 것을, 돈은 위대했다. 당시 200명이 넘는 관원생으로 동네에서 꽤나 유명한 체육관으로 자리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체육관, 더 많은 관원생, 더 넓은 입지를 다지기 위해 말 없이 떠난, 초심을 잃은 그들에게 배신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렇게 우리는 체육관을 그만두고 각자의 길을 걸으며 대학 진학을 하던 중에 첫 번째, 두 번째 관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매몰차게 가버렸으면 더 잘 살면 되는데 그런 상황들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죄를 지어 이렇게 산다는 사람들, 어릴 때는 한 없이 무서웠던 사람들이었는데 마치 아빠의 어깨를 보는 듯 했다. 그렇게 같은 팀이었던 사람들의 얼굴까지 보고 나서야 관장님들의 연락을 피했다. 그게 서로를 위한 길 같았다. 좋았던 것만 기억하며 질긴 인연을 놓아야 할 것 같았다. 우리를 저버려야 했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합리화하며 -


지금 성격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을 어린 시절, 관장님들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일에 감사하다. 또, 잊지 않고 미안하단 말로 용서를 구했던 용기에 감사하다. 내 안의 내재된 가능성을 발견하여 보석으로  갈고 닦아 더 큰 세상에 나를 세웠던 스승들에게 감사하며, 고민 끝에 또 자격증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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