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랑 Mar 03. 2023

안개는 걷힌다

아침 안개가 짙다. 거리로 나온 자동차들이 비상등을 켜거나 전조등을 밝히고 조심조심 서행한다. 안개는 눈이나 비만큼이나 위험하고 무섭다. 보이지 않으니까. 어림짐작할 뿐 앞의 상황을 모르니까. 간혹 아무 불빛도 없이 쌩 하고 달리는 차를 보며 깜짝 놀란다. 저 사람은 안개가 무섭지 않은가. 거침없이 달리는 거 보면 뭐 급한 일이라도 있겠지 싶다가 모호한들 어쩌랴, 좀 흐릿하면 어쩌랴, 목표가 분명하면 뚫고 나아가면 그만인 것을. 직진하는 모습이 좋다. 믿고 가는 순조로움이 부럽다. 어쩌면 저 사람은 안개의 순간을 슬기롭게 뚫고 나온 사람일지도 몰라.


오늘처럼 안개가 속수무책인 날이면 오래전 스승의 말이 떠오른다.


  “왜 이렇게 안개를 좋아해. 글에 수식어가 많은 이유가 돼!”


아무리 짙게 가려졌던 시야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걷히게 되어 있다는 게 안개의 성질이다. 안개로 있는 순간 답답하고 불안하고 모호한 시간이 지나면 사물과 일상은 언제 그랬냐 싶게 어제와 같은 말간 얼굴을 드러낸다. 흐린 것이 좋아 이대로 잠시 머물러도 좋지 않은가 싶은 안온함으로 자족하던 안개의 순간은 사라지고 현실은 민낯의 거울로 와 있곤 했다.  


학창 시절부터 안개를 좋아했다. 얼마쯤 흐릿한 게 좋았다. 어깨를 내린 사춘기와 버겁기만 한 이십 대를 지나며 안개는 친근한 또 다른 자아였다. 막연한 현실과 불투명한 진로, 취업과 결혼 등 덜컥이는 현실이 안개 속으로 숨어들게 했다. 안개와 대치하듯 혼자만의 안전지대 인양 그 안에 나만의 퀘렌시아를 만들곤 했다. 그러기를 반복하며 안개의 순간을 살았다.


농사일로 바쁜 아버지를 설득해 굳이 시내로 안경을 맞추러 갔던 중학교 때였던가. 시력이 나쁘지 않았는데 꼭 안경을 써야만 하는 이유를 갖다 붙였다. 어린 마음에 안경을 쓰면 퍽 그럴듯하게 보이는 줄 알았다. 도시에 사는 아이들에게 뭐 하나라도 꿀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눈에 안경이 걸쳐졌을 때 나는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세상이 너무 선명하고 분명해서 낯설기 짝이 없었다. 조금 흐릿해야 좋은데,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가도 좋았는데 모든 게 투명해서 싫었다. 도로 무를 수 없어 쓰기 시작은 안경은 이제 내게 신체화된 지 오래다.


안개는 인생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에 막연하고 두려워 안주하고 싶은, 한 발 내딛는 일이 어려워 주춤거렸던 나와 닮았다. 삶의 문턱 많은 부분을 혼자 외롭게 결정하며 조심조심 넘었다. 그런 중에 꼭꼭 숨고 싶은 날이 왜 없었을까. 핑계가 필요했다. 버거운 삶을 잠시 숨겨줄 대상이. 그게 안개라는 공간이었다. 매일 안개가 끼기를 바랐다.  


안개는 어떤 상징이었다. 안전한 곳, 편안한 시간, 믿고 싶은 친구,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의 공간이었다. 안개가 낀 날은 뭔가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의지를 종용하고 있는 나를 친숙하게 만났다. 스스로를 안개 속에 가두며 똘똘 뭉치는 자신을 벗어나고 싶은 자구책이었다는 것을 알겠다.


그래서인가. 스승은 글을 보면서 안개를 찾아냈고 수식어를 점검하도록 했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것을 계기로 내 삶의 안개에 대하여 여러 날 생각하게 되었다. 내 모호함과 자신 없음을, 숨고 싶은 마음을 걷어내려는 의지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모든 모호함은 결혼하면서 서서히 걷혔다. 생명을 키우는 일은 수식어가 필요 없는 그야말로 거침없이 판단하고 달리고 여차하면 뛰어야 하는 일이었다. 


사는 일에서 안개가 걷히니 점차 삶의 태도와 방식도 명료해졌다. 누구나 안개 속에서 헤매듯 허우적거리는 숙고의 시간이 필요함을 알았다. 나는 그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결국 안개는 걷힌다. 비록 오늘처럼 미세먼지 나쁨 수준의 일기예보가 있었으나 정오를 기점으로 쨍한 햇살이 비껴들며 투명하고 분명한 얼굴을 하고 새로운 하루가 열린다. 온갖 소음과 질주, 바쁘고 열정 많은 세상을 토해내며 햇살과 버무려지는 게 또한 안개이다. 안개의 순간은 잊힌다. 안개는 흔적이 없다. 그러나 누구라도 가슴에 하나쯤 안개와도 같은 시간을 품고 있지 않을까.


살면서 가끔 안개를 만나는 일도 그리 나쁘지 않다. 잠시 잠깐 나만의 안전지대를 확인하고 낯선 곳에 나를 놓아둘 필요가 있음을,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선물처럼 안개 같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안개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안개의 순간을 포착하여 때때로 숨구멍처럼 그 시간과 공간을 잘 활용해 보는 일도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첫 책으로 해외 진출 작가가 되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