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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Oct 16. 2023

백로의 가을

보통날의 시선2


초가을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데 아주 가까이 백로 한 마리 나들이 나오셨다. 벼 익어가는 황금 들녘에서 볼 일 다 보고 날아온 듯하다. 쭉 제 갈 길 갈 것이지 이 차선 도로 위를 느긋하게 거닌다. 다 건널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다행히 뒤에서 오는 차가 없어 비상 깜빡이를 켜고 휴대 전화를 꺼내 사진도 두어 컷 찍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기다렸다. 세상 편한 자세로 고개 꼿꼿이 들고 시선은 그윽하다. 어디로 갈 것인가 가늠하는 듯도 한데 내 생각 따윈 아랑곳없을 백로가 새삼 부러운 건 뭔가.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좀 막막하단 생각, 저 백로가 지금 나와 같은 막막함을 직시하기 위해 낯선 거리를 나서기라도 한 것처럼 친근하다.


건너라, 어서 건너라, 다 건널 때까지 기다려 주마.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백로의 몸에 쏟아진다.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아뿔싸, 뒤에 탑차 한 대가 서 있다. 예서 뭐 하는 것이냐고, 별사람 다 보겠다며 빵, 경적을 울릴 만도 한데 같이 기다려 주었다는 사실이 문득 고마웠다. 내 마음을 이해받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도 아니라면 탑차도 백로의 한가로움에 잠시 마음이라도 빼앗긴 것일까? 후후, 그래, 모든 게 조금은 여유로운 가을이니까.


이윽고 백로가 건너편 들녘 쪽으로 가로지르는 걸 보았던가. 나는 내 갈 길 간다. 가을은 또 제 갈 길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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