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날의 시선 5
바람이 부는 거리를 나서 들녘으로 간다. 벼를 수확한 논이 하나 둘 비어간다. 노랗게 출렁이며 수확을 앞둔 들녘을 보면 내 것인 양 마음이 넉넉하게 차오르며 뿌듯하다. 농부의 수고를 익히 알면서도 왠지 거저 생긴 선물 같다.
추수할 무렵이 되면 엄마는 말했었다.
“사람 입이 참 무서워. 저 넓은 들을 입 하나로 다 먹으니 말이다.”
엄마 없이 올해도 어김없이 들녘은 풍성한 노랑으로 출렁인다.
이맘때가 되면 꼭 생각나는 쌀이 있다. 바로 ‘찐쌀’이라고도 하고 ‘올벼 쌀’이라고도 하는 쌀이다.
어렸을 때는 ‘오리 쌀’이라고 불렀다. 아마 ‘올기 쌀’을 잘못 알고 있었나 싶은데, 네이버 사전에 보면 ‘올게 쌀’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풋 벼를 베어 낱알을 훑어내 쪄낸 다음 이를 말려서 방아로 찧어 키로 쳐 껍질을 걷어낸 보존식품’으로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논에 물길을 만들어 주기 위해 덜 여문 벼를 일부 베어내야 하는데 그때 베어낸 벼로 만들기도 하고 보릿고개를 넘어 양식이 떨어져 갈 무렵, 한가위가 오기 전 벼가 채 익지 않는 시기에 주로 해 먹었’는데 내게 ‘올게 쌀’은 군것질거리였다.
벼농사를 짓지 않았던 우리 집에 ‘올게 쌀’이 푸짐할 때가 있었는데 엄마가 외갓집에 다녀올 때, 대체로 가을 수확을 앞둔 무렵이었다. 아마 친정의 행사가 있어서 나들이 겸 다녀오는 엄마의 보따리 속에는 노란 콩가루 묻힌 인절미와 부침개, 그리고 ‘올게 쌀’이 꼭 들어 있었다.
손도 크고 마음이 넉넉했던 외숙모는 일곱 명의 시누이 보따리 싸느라 수고깨나 했을 터인데, 어렸던 우리들은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느라 대문이 닳도록 넘나들었다.
‘올게 쌀’은 고소하다. 오래 씹으면 더 달고 맛있다. 한 줌 먹고 두 줌 먹고 더 먹으려면 이 상한다고 엄마는 말렸다. 두고 먹으라고. 다섯 남매가 들러붙어, 그렇게 한 줌씩 덜어내면 쥐도 새도 모르게 바닥이 났다. 그럼,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지. “엄마 외갓집 또 언제가?”
외숙모도 외삼촌도 다 돌아가신 외갓집은 비었다. 외사촌들은 모두 객지로 나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찬찬히 떠올려 보면 풍요롭다는 말이 그때만큼 잘 어울리는 때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였던가. 둘째 아이를 가졌을 무렵 나는 생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 쌀을 씻을 때마다 꼭 한 줌 정도는 입에 넣고 씹어야 했다. 이 상한다고 극구 말리던 엄마도 멀리 있고 나는 이제 무엇이든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몇 달인가를 먹고 나니 시들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렸을 적 기억이 아이를 가졌을 때 입덧과 맞물려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풍경도 늙는다.
내가 보고 있는 들녘이 예전의 풍경이 아니듯 기억하고 추억하는 풍경은 이제 얼마만큼 늙어 있다. 마음 안에서 수런거리는 풍경을 간절히 꺼내 보아도 결코 지금을 살 수 없는 오래된 풍경일 뿐이다.
우리는 풍경을 쌓으며 살아간다.
그러기 위해 어쩌면 매 순간 자연을 보고, 사람을 보고, 삶을 직시하며, 새로운 풍경에 자기를 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훗날 떠올려 볼 풍경이 늙어 있을지라도 기꺼이 지금의 풍경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