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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Nov 17. 2023

생의 비밀 같아 아끼는 보라색

보통날의 시선 9

언제부턴가 가지가 좋았다. 가지가 생기면 기분이 좋았다. 아니 가지는 내게 처음으로 생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채소다. 그 색깔로 인하여. 

딱히 설명할 수 없는 가짓빛을 오래 마음에 두었다. 


햇살에 투명하게 노출된 가지는 신비로웠다. 초가을 무렵 시장에 가지가 나오면 무엇보다 먼저 서둘러 샀다. 색깔만큼이나 그 맛은 담백하다. 음식이 주는 질퍽함이 없다. 나는 생가지를 몇 개씩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예전에 엄마는 생가지 먹으면 입병 생긴다고 말렸는데, 입 안이 푸르게 물들고 풋내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지를 씹었다. 


사춘기가 막 시작될 무렵 이십 대 중반의 사촌 오빠가 죽었다. 멀리 이국에서 온 그의 죽음은 내게 가짓빛으로 왔다. 왜 이렇게 슬프냐, 싶게 죽음이 허무해서 나는 차라리 보라색이라 칭하고 죽음을 닫았다. 


할머니 집 대문 옆 텃밭에 가지가 몇 그루 심겨 있었다. 오갈 때마다 가지가 열리는 걸 보았던가. 처음인 듯 보라색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죽음을 치르고 집에 돌아왔을 때 할머니의 집은 슬픈 바다 그 자체였다. 나는 선뜻 집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대문 옆 가지 잎을 쥐어뜯었다. 내 사춘기가 뜯기고 있었다. 손에는 보라색 풀물이 배었다. 


가지는 그렇게 내 정서에 머물러 있다가 이제는 좋아하는 식재료 중 하나로 아낌없이 사랑받는 채소가 되었다. 


한여름 지나 슬슬 찬 바람이 불 때 가지는 단맛을 낸다. 이때 가지를 먹으면 통통 소리가 날 것 같이 아삭한 보라색 싱그러움이 입안을 즐겁게 한다. 


생가지를 기름 없이 구워 먹기도 하고, 올리브기름에 볶기도 한다. 쪄서 양념에 무치기도 하는데, 동생들은 가지 먹을 때 꼭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엄마가 해주던 가지나물 무침 맛있었다고. 어릴 적 입맛을 기억하는 우리는 가지 맛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되기도 한다. 


근래 들어 텃밭에 가지를 심는다. 몇 그루만 심어도 늦가을까지 두고두고 따먹을 수 있는 게 가지다. 혼자 다 못 먹어 두루두루 나눠 주다가 그래도 남으면 말린다. 마른 가지볶음은 또한 별미다. 틈틈이 말려 놓은 가지를 겨울이 오면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니 다른 사람도 그런 줄 알고 나누는데 대체로 다들 마른 가지나물을 좋아한다. 


나는 보라색의 다양한 색을 아낀다. 처음 보라색이 내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보라색은 줄곧 내 곁에 있다. 보라색이 품고 있는 깊고 오묘한 색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대놓고 보라색 만연한 것은 그다지 아끼지 않는다. 


보라색은 숨겨 놓고 싶은 생의 비밀 같아서 나는 보라색을 좋아해! 라고 소리 내어 단정 짓지 않는다. 그냥 좋아하는 색깔 중 하나라고 마음에 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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