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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여름의 일 01화

여름의 일- 옥수수

보통날의 시선 40

by 호랑
보통날의 시선 40 옥수수 그림.jpg

옥수수는 여름에 먹어야 제맛이다. 한 솥 가득 쪄 뜨거울 때 뜯어야 비로소 옥수수와 한 몸이 된다. 뜨거운 옥수수를 왼손과 오른손에 번갈아 옮겨 쥐며 먹는 동안 어느새 끝을 향해 가는 옥수수. 아쉽기 짝이 없으나 걱정할 것 없다. 탱글탱글한 옥수수가 “나도 그렇게 맛깔나게 먹어 줄 거지?”라며 대기하고 있으니까.


옥수수 좋아하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옥수수가 생기면 내게 가져온다. 그들은 내가 옥수수 냄새를 좋아하는 것까지는 모를 것이다. 옥수수는 맛도 좋지만, 냄새가 좋다. 후덥지근한 여름날 어디선가 옥수수 찌는 냄새를 훅, 맡으면 그제야 여름의 한복판을 통과하고 있음을 깨닫고 서둘러 옥수수를 사 먹으러 가곤 했다.


아빠의 옥수수밭은 더웠다. 어린 나는 옥수수밭이 싫었다. 큰 옥수숫대 밑을 기어다니며 아버지가 따놓은 옥수수를 줍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아빠가 이 옥수수를 언제까지 심을까? 고개를 저었는데 두어 해 심다 그만두었다. 타산이 맞지 않았나 보다. 생계 수단의 하나였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농사에 초짜인 아빠가 이것저것 심으며 시행착오를 겪던 시절이었는지 이 또한 짐작일 뿐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옥수숫대가 워낙 커서 조그만 아이는 눈에 띄지도 않았다. 겨우 옥수수 몇 개 주워 밖으로 나오면 부서질 듯한 여름 햇볕이 눈을 찔렀는데, 바구니의 옥수수는 탱글탱글 영글어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키가 큰 옥수숫대가 좋았다. 바람에 심하게 너울거리는 커다란 잎이 좋았으며, 노랗게 익어가는 옥수수를 기다리거나 바라보는 일이 무엇보다 흐뭇했다. 남의 옥수수밭도 보기에 좋았다. 옥수수를 심는 그 마음이 넉넉해 보여 알지 못하는 사람이어도 점수를 후하게 주고 들어갔다.


옥수수밭은 특유의 냄새가 떠다닌다. 물론 옥수수가 익어 가거나 열기에 지친 잎과 줄기가 처지면서 뿜어내는 냄새와, 흙에서 올라오는 냄새, 햇볕이 익는 냄새와 거름 냄새 등이 섞인 냄새일 수 있겠으나, 나만 맡을 수 있는 독특한 냄새가 있다. 냄새는 팔월 더위와 이국적인 옥수숫대, 가난한 아빠와 어린 딸이 공존하던 시간과 장소가 배인 그런 냄새는 아닐까? 싶지만 세월이 흘러 내 스스로 연출해 낸 냄새일 수도 있다. 여름이 오면 그냥 보낼 수 없는 연례행사처럼 우리 집 압력솥은 옥수수를 익히느라 분주하다.


지난 4월 중순 텃밭에 옥수수 모종 30개를 심었다. 재작년에 고라니에게 모조리 빼앗긴 뒤로 허망해서 심지 않고 걸렀는데 옥수수가 없으니 여름 밭이 심심한 듯하여 올해는 심기로 한 것이다. 긴 가뭄도 아랑곳하지 않고 옥수수는 하늘을 맘껏 찌른다. 옥수숫대로 인하여 여름 텃밭이 흥겹게 출렁인다.


틈나는 대로 밭에 들러 옥수수를 살핀다. 슬쩍 껍데기를 까보기도 한다. 영글지 않았다. 옥수수수염이 까맣게 변할 때쯤 따야 한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다. 행여 고라니라도 다녀가면 어쩌지 싶어 조바심을 치는데 남편 말에 의하면, 고라니도 어린 옥수수를 좋아하지, 다 자란 옥수수는 맛이 없어 먹지 않을 거라는 말이 설득력 있어 기다리는 마음을 잠자코 접는다. 고라니가 다 자란 옥수수 맛을 알아차리지 않은 게 어디란 말인가.


이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 집 앞을 지나가다가 옥수수 8개를 주고 가는 딸, 앉은자리에서 옥수수 3개가 뼈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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